우리는 늘 세상이 망하기를 빈다. 그 사람을 보기 싫으니, 그 상황을 마주하기 싫으니, 내일은 출근하기 싫으니 손쉽게 멸망을 바란다. 하지만 정말 지구에 당장 소행성이 충돌해서 모두가 죽어야만 한다면, 그 상황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말은 대재앙이며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재해다. 많은 이들이 다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모두가 죽어야 하는 세상의 끝에 놓인 단어가 종말이다. 끝나고 끝나가는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빠른 감정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이런 주제를 다루는 보통의 콘텐츠나 서사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텔링이다.
하지만 어느 날 황당한 뉴스가 들려온다. 127년 뒤, 지구가 망한다는 소식이다.
미루어진 절망
김초롱 작가의 소설 〈안녕하세요! 지구 종말의 날입니다!〉는 매우 독특한 상황을 가정한다. 앞서 말했듯 세상의 멸망은 빠르고 극적일수록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러나 종말은 모름지기 내일 당장, 지금 바로 일어나야 한다는 많은 이야기와 달리, 이 작품에서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내민다. 제목 그대로 안녕하세요, 하고 안부 인사를 건네듯, 종말은 ‘별 것 아닌 모습’으로 찾아온다. 지구가 망해버린다는 말이 소설의 도입에 가볍게 제시된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시작인가. 127년 뒤에 지구가 끝난다니. 실제로 이런 뉴스가 나온다면 아무도 이 소식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사실 127년은 한두 개의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국가가 일어날 수도 있는 시간이다. 심지어 소행성 같은 것이 떨어지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100년 안에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시간이 그쯤 지나면 현세대의 사람들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과학기술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없다면. 작가가 집중하고자 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절망 없는 종말.
인류의 마지막을 다룬 소설임에도 이 작품의 초반에는 ‘절망’이 없다. 당사자성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죽음이란 남의 일일 뿐이다. 단지 후손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만이 마지막 인류 세대가 계획한 최선의 방어책이었다. 아무도 긴장하지 않고, 아무도 우울하지 않고, 아무도 절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2020년에 태어난 이들은 인류의 “마지막 세대”라 불렸다.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갈등과 감정이 절정에 달하는 구간은 127년 후에나 올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진행에 굴곡을 주기 위해 나름의 방책을 내놓는다.
흔히 일반의 사람들이 미래를 예측한다면 ‘현재’를 기준으로 따지기 마련이다. 지금의 세대가 다음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도, 자원의 고갈이나 환경의 파괴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도 전부 자신들에게 영향이 오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확신은 ‘짧은 인간의 수명’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인간이 100년 이상의 수명을 확보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현세대가 종말을 목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이 지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썼어도 나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가 시한부 판결을 받은 날, 나는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인류의 수명을 늘린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산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한 가지 의문을 느낀다. 모두가 담합하여 다음세대를 낳지 않기로 했던 인류는 어찌하여 수명 연장 기술의 개발을 보고만 있었는가. 작품을 끝까지 읽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작가는 독자의 이러한 질문을 해소할 수 있도록 소설에 더 적절한 장치를 한두 가지 더 넣어줄 필요가 있다. 많은 재력을 가진 한 사업가가 자신의 안전을 담보할 비밀스러운 계획을 짠 다음, 능력 있는 과학자들에게 수명 연장 기술을 개발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 사실을 공개해서 한순간 돈 많은 이들의 교주로 군림하는 전개를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이 소설 안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찾기 위해 일종의 상상을 더할 필요가 있다. 독특한 설정을 했다면 좀 더 정교하고 의심스럽지 않은 세계를 짜야 한다. 독자가 하나의 의심도 없이 그 공간에 빠져들 수 있도록. 이 소설은 대체로 성공적이며 독자들을 끝까지 이끌고 갈 힘이 있다. 그렇기에 좀 더 촘촘한 설정과 인물의 구성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시놉시스
사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시놉시스 같다’였다. 완결성과 주제의식이 있지만 더 긴 내용의 소설을 짧게 압축하거나 축약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작품의 얼개를 간단히 소개하는 것처럼. 분명 이 시놉시스를 읽는다면 누구든 흥미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시놉시스가 아닌 소설이라면 뒷이야기나 중간의 내용이 더 채워지기를 바랄지 모른다. ‘지구 종말이 127년 남은’ 이 시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은 엄청나게 많다. 1하루 이틀도 아닌 127년이다. 서두에 말했듯 하나의 국가가 일어날 수도, 하나의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긴 시간에 사람들에게 깃든 불안함이 겹친다면 어떤 대단한 일이 벌어질까.
이런 설정에는 보통 세 가지 정도의 요소를 추가할 수 있다. 첫째는 ‘격차’이다. 빈부 격차, 사회적 지위의 격차, 또는 소수 국가에서 여전히 인정하는 계급의 격차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닥칠 때 가장 크게 벌어진다. 지금은 더이상 재난이 모두에게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소수자, 장애인,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예정된 재난은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까. 혹 그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딛고 일어서려는 인물이 있다면, 혁명이 일어난다면, 재력가가 자신의 이익을 취하지 않고 자선 사업을 벌인다면, 하지만 그것 역시 어떤 음모를 배후로 두고 있다면. 계층 간의 차이와 이에 수반되는 차별은 소설을 통해 더 많은 담론을 낳을 수 있다. 127년이 남은 지구에서 인류는 평등해질 수 있을까. 아니면 안타깝게도 서로의 간격을 좁히지 못한 채 파멸을 맞을까. 그것은 작가의 선택이다.
둘째는 앞서 언급된 ‘종교’이다. 종말과 휴거 등 세계의 여러 종교는 저마다의 방법대로 인류의 마지막을 예언한다. 최근에는 인도의 10대 소년이 유튜브를 통해 예언자로서 화제가 되고 있을 만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독특한 방법으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기도 했다. 사실은 127년 뒤 인간이 망하지 않는다고 예언하는 집단이 등장한다면, 또는 소설에 나오듯 제3의 공간을 주장하며 그곳으로의 이주나 하늘로의 승천을 주장하는 종교가 생긴다면 (외계인을 믿는다는 설정보다는 그럴듯한 신을 하나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 전능한 존재는 사람들에게 쉽게 신뢰를 심어주기 마련이니까.), 아니면 온라인으로 삽시간에 퍼져 세계를 지배하게 된 어떤 예언자의 예언을 다루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이 된다. (앞서 말한 인도 소년의 사례를 자료 삼아 가공하는 작업은 어떨까.)
셋째는 사랑이다. 특별히 사랑은 이 작품 안에서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가장 적절하고 매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아무래도 ‘마지막 세대’의 사랑이 아닐까. 127년 동안 서서히 다가오는 종말을 체감했고, 결국 수명이 연장되어 예견된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은 두 인물의 사랑. 127살이 된 어느 해에 인생의 마지막을 맞는 수영과 주인공이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을 더욱 살릴 수 있는 요소는 역시 마지막 세대끼리 공유할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이 아닐까. 각 단락의 앞에 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카운트다운 하는 방식을 조금 더 촘촘히 하여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견하고 그에 따른 감정을 묘사하는 방향 역시 제시해볼 수 있겠다.
맺으며
당장의 멸망이 아닌 유예된 죽음 속에서 서서히 최후를 기다리는 마지막 인류의 한 사람. 그가 느꼈을 어떤 단상을 꿰어놓은 이 소설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100년의 시한을 가진 채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들이니 더욱 이 소설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만약 127년 뒤에 내가 죽기로 예정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류 모두의 죽음이라면. 나는 마지막 인류로서의 축복을 누리는 것일까, 아니면 시시각각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 하지만 종말이란 일상이 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라는 것.
그것이 비록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이 먼 미래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