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말씀드립니다. 이 작품은 알페스가 아니며 주인공들은 모두 가상 인물입니다.)
3월의 시작을 맞아 장편 역사소설을 리뷰하려고 브릿G를 디비다가 놀라운 작품을 찾았다.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의학사,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이라는 광대한 주제를 다루는 BL(!!!) 작품, 바로 김해경 작가의 <워킹 인 투 더 라이언스 덴>이었다. ‘Walking in to the lion’s den’ 곧 ‘사자굴에 걸어들어가다’는 뜻을 가진 제목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내가 이 작품이 BL인 데 놀란 이유는 동성애를 다루고 있어서가 아니라, 대하소설을 몇 개나 쓸 수 있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BL이란 장르에 녹여 내겠다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정말 충격적일 정도로 독특하고 참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참신한 작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냉큼 읽어 보았는데, 이 작품의 내용은 안타깝게도 작가의 아이디어만큼 참신하지 않았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동그란 커버춰 초콜릿에 코팅을 씌우고 또 씌우듯이 클리셰에 클리셰를 거듭한다. 첫 번째 클리셰는, 빈민가 출신 이방인(?)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총명함을 드러내어 지나가던 유대인(이 사람은 확실한 이방인) 의사에게 조수로 발탁되는 것이다. 그 뒤, 주인공의 스승이 된 의사가 전쟁터로 떠난 뒤 사형을 당하자, 주인공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스승이 억울하게 죽은 일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두 번째 클리셰이다. 이 두 가지 클리셰만 놓고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재미있는 내용이지만, 작품의 클리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서양 격언에는 물론 “Third time’s the charm.” 이란 말이 있지만 이 작품의 세 번째 클리셰는 마법이 아닌 독으로 작용했다.
‘억압적인 시대에 개명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힘은 부족한 인물’은 이미 수많은 역사 창작물에 등장한 바 있는 인물상이다. 그런 인물들은 서양사 부문에선 주로 중세와 근세를 다룬 창작물, 우리 역사 부문에서는 조선 시대를 다룬 창작물에 많이 나온다(신기하게도 우리의 조선 시대와 서양의 중근세는 어느 정도 겹친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그 조력자인 의사가 모두 그런 인물에 해당한다. 두 사람은 종교를 믿지 않으며, 상당히 발전된 소독 방식을 알고 사용하는 데다 필요하다면 신분의 벽을 넘나들며 사회 질서에 저항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들은 아직 역사 창작물을 많이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매우 참신해 보이겠지만 역사 창작물을 어느 정도 본 독자의 눈엔 참신함이 덜해 보인다. 두 사람과 같은 인물들은 사실 지나간 일들을 향한 현대인의 아쉬움이 만들어낸 일종의 ‘역사 속에 떨어진 현대인’으로, 이미 수많은 역사 창작물에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사견을 조금만 말하자면, 나는 ‘hindsight’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행위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고 본다. 지금 와 아무리 아쉬워해도 역사는 바꿀 수 없고, 그 아쉬운 역사의 산물들이 결국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역사를 그 시대의 맥락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한다. 학문으로서의 역사 연구에서든, 아니면 역사 창작물에서든 말이다.
역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작품의 전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들이 사실 역사적 오류라는 것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선 주인공은 아일랜드 출신(켈트족) 아버지와 덴마크 출신(게르만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생김새가 일반적인 영국인(게르만족)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 차별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켈트족과 게르만족은 언어상으로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데다 유전적으로도 그 차이가 적어서 사실상 외모만 보고 켈트와 게르만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두 종족은 상호간의 영역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데다, 역사 발전 과정을 거치며 전 유럽에 퍼져 나갔기 때문에(당연히 이 과정에서 혼혈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특히 영국 같은 경우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영역에 모두 해당하기 때문에 혼혈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 그 외모적 차이가 적다. 그래서, 만약 이 작품의 주인공이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는 설정을 꼭 넣어야 했다면 외모보다는 억양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고 설정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더욱 정확했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 설정상 주인공의 부모 모두 이민을 와서 주인공을 낳았기 때문에, 부모의 영어 억양은 좀 어색할지 몰라도 주인공의 억양에는 문제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인공이 가진 은발(내지 백금발) 역시, 실제 역사에서는 차별받는 요소로 작용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사람의 동경을 받는 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이 작품의 배경인 18세기에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은발을 미의 기준이라고 여겼다. 이 시대 상류층들이 머리카락에 밀가루를 뿌려 은발을 창작하기까지 했었던 사실은 당시 그려진 여러 초상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살았던 게르만족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작품 주인공이 가진 것과 비슷한 천연 은발을 가지고 있어 당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만약 은발이 차별받는 요소였다면 켈트족인 프랑스 민중들이 혁명기의 온갖 흑색 선전들로 그를 비난할 때 은발 이야기가 빠질 리 없었을 텐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의 은발을 욕하는 혁명기 선전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지적할 점이 여기까지였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하나가 더 있다. 이 작품의 장르이자 중요한 키워드인 동성 로맨스에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과 별로 접점이 없을 뿐더러 동성애자라는 묘사도 없던 하인이 갑자기 주인공에게 욕정을 품는 묘사를 보고, 나는 독자로서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주인공도 동성애를 하는 데 별로 거리낌이 없는데, 18세기 영국의 종교적 분위기는 상당히 엄격했기 때문에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도 적대적이었다. 주인공 아버지의 출신 지역이 완고한 가톨릭 지역이던 아일랜드고, 어머니 역시 개신교 지역이었던 덴마크 출신이란 걸 고려하면 주인공의 그러한 행동은 더욱더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품의 독자이자, 브릿G에서 같이 역사 창작물을 연재하는 작가로서 나는 김해경 작가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역사 창작물에서 역사적 오류가 아예 없기는 물론 힘들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할 수 있는 한 꼼꼼히 조사해서 작품에 활용하는 일은 양질의 작품을 창작해 내기 알맞은 주춧돌이 된다. 인물의 심리나 행동 묘사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더 나은 로맨스를 창작하는 데 특효약이다. 이 두 가지만 염두에 두고 글을 써도 <워킹 인 투 더 라이온스 덴>은 지금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