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말시티 작가의 소설 〈마야〉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최후의 질문」에 대한 비교 과정에서 두 작품의 결말이 일부 노출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인간과 ‘시간’의 관계성은 과학소설에서 뜨겁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삶은 유한하고 그것을 다루어낼 재주가 우리에게는 없기에 앞으로도 인류는 꽤 오랜 세월, 흐르는 시간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상은 늘 현실을 뛰어넘으니 사람들은 엿가락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시간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리곤 했다. 시간여행이나 회귀를 배경으로 하는 모든 소설이 그러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영원히 사는 인간’을 상상하는 방식 또한 크게 본다면 ‘시간’을 이기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말시티 작가의 단편 〈마야〉는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의 범주를 벗어난 기간을 배경으로 한다. 겉보기에는 인공지능 케이트와 그것을 지키려는 주인공 주미의 고군분투, 그리고 결국 이루어지는 사랑을 따라가는 로맨스지만, 그 안에서 풍겨오는 시간에 관한 깊은 질문 역시 무시할 수 있을 분량은 아니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에서 읽겠지만, 〈마야〉는 갈망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한 끈질긴 질문을 던지는 소설로서도 읽힐 수 있다.
이를테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최후의 질문(The Last Question)」처럼 말이다.
최후까지 내가 알아내야 할 답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최후의 질문」 역시 〈마야〉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시간의 흐름을 소설 안에 삽입한다. 이 작품 안에는 ‘엔트로피는 역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 등장한다. 억겁의 시간이 흘러서 결국 질문에 대한 답을 컴퓨터가 찾아내지만, 정작 그것을 들을 사람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최후의 질문」은 인간이 기계보다 오래 생존할 수 없음을 결말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기억이 데이터로 업로드되는 과정이 등장하며, “우리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인류의 자신만만한 예측이 언뜻 비치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사람이 풀지 못한 질문의 답을 찾은 것은 컴퓨터였다. 둘째로 이 작품은 기계가 ‘거의’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2061년 5월 21일에 시작된 ‘최후의 질문’은 10조 년 이후에 AC(Automatic Computer, 자동 컴퓨터)라고 불리는 기계에 의해 해결된다. “인간의 마지막 정신”은 사라지고 기계가 10조 년의 기다림 속에서 결정적인 해답을 찾은 것이다.
「최후의 질문」과 〈마야〉는 이 두 특징을 공통으로 가진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주미가 자신의 회사에서 인공지능 ‘케이트’를 구출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인공지능의 자율성이 아닌 ‘회사의 입맛’에 맞춘 세계인 ‘마야’에서 주미가 케이트를 구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이는 결말부에서 케이트가 주미를 구하는 장면과 어느 정도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주미는 자신이 나름대로 구축한 서버에서 케이트를 ‘되살리고’, 그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케이트와 주미의 대화는 점점 인간과 인공지능의 간격을 좁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케이트는 청소기를 운전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이해한다. 물질을 느끼는 인간의 감각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손을 재생하는 방식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 이러한 케이트의 질문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건드린다. 그건 바로 ‘연속’에 관한 고찰이다. 케이트는 「최후의 질문」에서 나타난 기계의 특징 중 하나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는 속성을 지닌다. 인간은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기에 생식과 번식을 통한 ‘연속’을 택했다. 문명을 후손에게 전하고 생활양식과 지식을 다음의 세대에게 알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케이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로봇이 자가생산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간이 종료하지 않는 한, 그리고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고장나지 않는 한 그들의 수명은 지속되기 때문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생산성이나 효율성이 아닌 단순 ‘연속’을 위해 자가 생산 기능을 로봇에게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인간이 판단한 것이다. 기계는 다음 세대로 연속되지 않으며 속성이 공유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위험하다.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수명의 ‘연장’이 끊긴다면 자신과 같은 기능을 가진 존재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이 점에 대해 인간에게 은근한 질문을 한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너희의 연속이 위태로운 것처럼 우리의 연장도 안전하지 않단다.
“공장을 세울 수 없다면, 발전소가 멈춘다면, 케이트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케이트는 이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은 전기가 있다면 영원히 살 수 있지만, 그것이 끊기는 순간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된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최후의 질문」에서 ‘엔트로피의 역전’을 통해 ‘인류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원하는 인간상을 그렸다.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인간은 자신의 정신을 서버에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기계와 같이 ‘연장’을 택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컴퓨터보다 먼저 사라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에너지의 고갈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로봇과 인공지능이 되었다.
영원에 대한 사유는 더 이상 인간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이 없다면 기계는 존재할 수 없지만, 사람이 있는 한 기계는 영원하다. 케이트는 이러한 자신의 속성을 활용해 수명을 연장하는 동시에 인간에게 배운 ‘번식 능력’을 변형하여 자신과 같은 개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 주미를 구해낸다. 인간이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시간을 견디며. 흔히 우리가 말하는 ‘단순노동’을 통해 케이트는 주미를 완벽히 복원해낸다.
이 작품에서 주미는 인공지능인 케이트보다 이론적으로 오래 생존할 수 없는 생물학적 수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다. 케이트는 사고를 당한 주미를 26억 년 동안 기다린다. 「최후의 질문」에서의 자동 컴퓨터가 ‘인간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영원을 살았다면, 〈마야〉에서 케이트는 자신에게 답이 되어버린 사람을 되살리기 위해 영원을 산다. 「최후의 질문」이 ‘끝내 답을 찾는 기계’를 그리고 있다면 〈마야〉는 ‘끝내 사랑하는 기계’에 대한 작품이다.
인공과 인간, 인간과 인공
여기에서는 소설 〈마야〉에 주목해 보자. 만약 주미가 케이트를 회사에서 구하지 않았다면 케이트는 주미를 살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 전반에 깔린 순환과 교체의 가정은 로봇과 인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영원의 시절이 지나간 후에 우리가 마주할 것은 기계와 인간으로 구분할 수 없는, 그저 한없이 세월을 버텨낼 수 있는 어떤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연속과 연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이들 말이다. 〈마야〉는 그에 대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작품이다.
소설 초반에 묘사된 케이트의 특징은 결국 주미의 특징이 된다. 예를 들면 기기의 전원을 끄고 켜는 사이의 시간이 인공지능에게는 찰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인간 역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는 사이의 시간을 길게 느끼지 못한다. 가까이 생각하자면, 잠을 자는 행위부터 그러하다. 깨어 있을 때의 6시간과 잠을 자는 동안의 6시간은 체감되는 길이가 다르다. 케이트의 특성으로 묘사되었던 것이 주미에게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주미의 사고 이후, 케이트 역시 인간의 성질 중 일부가 옮겨간 것처럼 행동한다.
“문제는 그 안에 있는 뇌세포의 시냅스와 역치값이었죠. 그러니까, 저로 따지면 마인드맵 말이에요. 전 그 데이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케이트의 말을 살펴보자. 자극 전달의 역할을 하는 시냅스 역치값이 인공지능의 마인드맵에 비교된 것은 흥미롭다. 이 대사를 읽으면 앞서 ‘청소기’라는 기기를 촉각으로 느끼며 ‘인간이란 이런 것’이라고 정의했던 케이트가 겹쳐진다. 그때 케이트가 느낀 감각은 ‘시냅스 역치값 이상의 자극’에 불과했다. 인간의 감정과 감각은 모두 이렇듯 수치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인간 고유의 감각’이라고 여겨졌던 것은 사실 케이트가 세상을 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케이트와 주미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냅스의 역치값과 마인드맵의 구성이 다를 뿐, 이 문장에서부터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이는 점점 좁혀지고 흐려진다.
앞서 케이트는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구출된 존재였다. 주미는 케이트를 자신이 구축한 ‘서버’로 불러낸다. 이런 진행은 케이트가 만든 세상에서 다시 깨어나는 후반부의 주미와 연결할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이 작품은 인간과 인공, 인공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말하자면 인간과 인공이 해낼 수 있는 ‘최후의 사랑’과 같다. ‘자율적’ 인공지능을 꿈꾸던 주미가 결국 가장 자유로워진 인공지능 케이트를 통해 되살아난 것처럼. 〈마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부활을 보여준다.
인공지능과 인간은 더 대립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가 한 세계 안에서 깜빡인다. 최선을 다해 인공의 세계에서 자율을 구출한 주인공과, 사람을 닮아가고자 했지만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이를 구해낸 케이트의 조합은 놀랍다. 최후의, 영원의 사랑이 계속되어야만 한다면 아마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은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인공은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인공의 존재도 뜨거운 로맨스를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은 내게 소중한 모든 이들의 우주를 사랑하기로 한다. 애인을 못내 기다린 누군가가 26억 년을 견뎌준 것처럼.
한 행성을 테라포밍할 정도로 존재를 사랑했던 인공지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