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말 혹은 고백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는 여자를 망나니라 부른다면, 천한국의 2황녀 예현친왕 이진원은 망나니가 맞겠죠.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단에 정리된 것만 112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개성이 담긴 캐릭터로 살아 움직여 다채롭게 채워지는 이야기를 시대착오적이라 부른다면, 이연인 작가님의 가상시대 동양풍 로맨스 판타지 <별리낙원>은 시대착오적인 작품이 맞아요.
물론 쉽고 직관적인 서술과 꼼짝없이 다음화를 결제하게 만드는 후킹이 중요한 요즘의 웹 연재소설들과 <별리낙원>은 지향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지적도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죠. 하지만 달리 보면 시대착오적이란 말은 얼마나 큰 칭찬인지요? 시대의 흐름을 뛰어넘는 클래식 작품이라는 뜻이 되니까요. 들이댄 기준이 배타적이라는 반성만 있다면요.
저는 아무리 관대하게 평가를 해 봐도, 대부분 분야에서 평균 혹은 약간 아래쪽에 속하는 편이에요. 제대로 된 감상을 위해서는 충분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라는 제 평소 신념에 비추자면, 꽤나 불리한 입장이죠. <별리낙원>을 감상하는데 있어서도, 동양의 전통 문화나 시대극 등에 충분한 관심과 배경지식을 갖춘 독자에 비해, 제 감상은 아무래도 평면적이고 놓치는 부분도 많을 수 있어요.
그런 주제에 뭘 안다고 리뷰까지 쓰기로 했느냐 하면, 제 스스로가 평균적인 독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 말은 곧 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의 방대한 스케일과 낯선 단어들에 겁을 먹을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미천한 저라도 그런 사람들에게 길잡이 역할이 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재미있게 읽은 만큼,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바람 잘 날 없는 황실의 다사다난한 사랑 이야기
천한국은 나라도 가정도 여성들의 권위가 강하고 남성은 가군을 보필하는 가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문화를 가진 가상의 황국입니다. 황제의 둘째 공주 즉 2친왕인 주인공 이진원을 비롯한 여덟 명의 친왕들은 각자의 욕망과 시샘과 다소간의 우애 속에 서로 밀고 당기며 나라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친왕 개인뿐 아니라 남편인 친왕공, 이익관계에 있는 가문이나 당파, 그리고 판타지 요소의 중심인 수신 교단까지 가세해서 갈등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지요.
그 와중에 2친왕 이진원은 상처 투성이라 더 이상 흠집이 날 곳도 없는 평판을 얻는데 매진하여 ‘망나니 황녀’라는 칭호를 획득합니다. 그러다 사미르 대륙에 위치한 국가 아르투르와의 전쟁터에 보내지죠.
천한국이 한중일 기반의 동양 문화권이라면, 사미르는 이슬람 문화권의 베이스가 깔려 있습니다. 천한국과는 반대로 여성의 인권이 바닥 수준이고,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내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어요. 이곳에서 진원은 압도적인 재력을 활용하여 사람들을 돕고, 한 남자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가 (151화 기준 이 부분의 자세한 내막은 아직 밝혀지지 않음) 우여곡절 끝에 화친혼을 하는데, 천한국으로 장가를 온 아르투르의 왕자가 카밀, 천한국 이름 선우이고, 그가 바로 사미르에서 헤어진 운명의 남자입니다.
복잡한 궁정, 상반된 문화, 한 번 크게 틀어진 연애사.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 되었습니다. 잠깐! 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죠. 진원과 선우는 각자 탁월한 신력(수신과 화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홀딱 반해 낯을 붉힐 정도로 절세미인들입니다.
새로워! 짜릿해! 최고야!
집에서 편하게 누워 있는 대신 돈을 들여서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 주는 재미일 거예요. <별리낙원>에도 새로운 요소들이 많아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위해 엘프들의 언어인 엘비쉬를 창조했고, <스타 트렉>에는 클링온어가 등장하지요. 이연인 작가님은 사미르어를 창조했습니다. 물론 작중에 등장하는 것은 단편적인 어휘들이지만, 모르긴 해도 이연인 작가님은 “내 요동치는 가슴을 당신의 촉촉한 입술로 달래주세요.” 정도의 기본적인 문장은 사미르어로 충분히 구사하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 외에도 한자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서 사용함으로써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예를 들어, 신출귀몰(神出鬼沒) 대신 신현귀은(神顯鬼隱)이라는 표현을 쓴다든지, 커피를 가리키는 여차(黎茶)를 등장시키는 식입니다. 저야 고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저 모든 게 새롭지만, 이런 것에 익숙한 독자들은 작가님의 다양한 변주에 더욱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낯선 곳에 직접 여행가는 것과 반대로, 티비 예능프로그램들도 많다시피, 외국인들이 우리 문화를 경험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가 있지요. <별리낙원>에서는 장가를 온 선우가 천한국의 새로운 문화, 그리고 생소한 궁중의 격식들을 경험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조신한 신랑감 답게 많은 예습을 해왔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건 또 다르지요. 예예, 몸으로요.
여권이 강한 천한국에 대한 여러가지 묘사와 대사들에서 나타나는 (현실의 우리 사회와의) 성별반전이 주는 짜릿함은 꽤나 노골적입니다. 남자의 용모에 대한 품평과 조신함을 강조하는 대사가 자주 등장하고, 작중의 남편들은 아내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선우의 출신지가 (현실의 우리 사회와 비슷한) 정반대의 문화를 갖고 있다는 점을 수시로 상기시킴으로써, 그 묘미를 배가시켜요.
최근에 SNS 상에서 이연인 작가님과 단편과 장편의 작법에 대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단편만 깨작이는 저는 ‘손잡았다 치고 뽀뽀 좀 합시다’를 주장했고, 작가님은 ‘도대체 어쩌다가 뽀뽀를 하게 된 건지 1만자 분량의 설명’을 요구하셨어요. 과정을 다 쓰지 않으면 이야기를 늘어놓는 의미가 없다고까지 하셨죠. 농담 섞인 대화였지만, 저기에 이연인 작가님의 작품관이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본인의 걸음걸이로 꼼꼼하고 세심하게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빠짐 없이 담아내죠. 정말이지, 최고예요!
별리 그리고 낙원
작품의 제목 <별리낙원>은 이별과 낙원을 조합한 것입니다. 원래 제목이었던 <낙원과의 이별>으로 짐작컨대, 아마도 이별의 대상은 낙원, 그러니까 장소나 상황이겠지요? 진원이 처음부터 줄곧 선우와의 이별을 전제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설마 그 둘이 이별을 하는 건 아닐 거라 믿어요. 만약 스토리가 그쪽으로 진행된다면, 저는 그날로 결별반대 서명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작가님께 직접 여쭤본 바에 따르면, 151화 기준으로 전체 스토리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상황이라고 해요. 낙원이 의미하는 바가 ‘연인-선우’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고민해 봤어요. 원치 않는 황권 다툼에 어쩔 수 없이 휘말려든 진원에게 과연 ‘낙원’이란 무엇일까요? 과거에 선우라는 이름을 갖기 전의 카밀과 비교적 자유로운 마음으로 밀당을 하던 그곳이 낙원이었을까요? 여러모로 골치는 아프지만 남 부럽지 않은 권세와 재물, 그리고 예쁘고 조신한 남편을 가진 현재의 왕궁이 낙원일까요? 혹은 끝내 등 떠밀려 앉게 될 것만 같은 미래의 황제 자리가 낙원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낙원=선우’ 외엔 마땅한 답이 없어서, 답안 제출을 포기하겠습니다.
다만, 덕분에 작품과는 큰 관련이 없어도 중요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어요. 여러분의 낙원은 무엇인가요?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 있나요? 여러분의 답이 어떤 것이든 그것과 이별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