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세계와 다른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배경 그 자체가 캐릭터와 이야기에 기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새로운 배경을 꾸며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작품들에서 세계관은 주요 등장 인물들과 함께 당당히 주인공 목록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낙원과의 이별’이 연말 시상식에 초청받아 주연상을 받는다면 쟁쟁한 사람 후보들을 제치고 세계 그 자체가 수상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현실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의 공간, 가상의 시대적 배경 속 어느 전제군주국. 황제와 황실을 중심으로 하여 황제와의 혈연관계를 기준으로 한 수직적인 신분 피라미드가 철저히 자리 잡은 곳입니다. 호칭이나 정부 편제는 명, 청 시기의 것을 변형시켜 따르는 듯 하고, 주요하게 등장하는 인접 국가의 경우에는 아랍의 것을 많이 빌려온 듯하네요. 여기까지는 여느 무협소설이나 가상역사물에서 흔히 다뤄지는 부분이지만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이 하나 있다면 남녀가 (거의) 완전히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게 드문 설정은 아닙니다. 많은 SF 물에서 쓰고 있고, 시대극의 경우에도 중국 드라마 ‘랑야방’에서는 남녀 간 직업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오지요.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해 주는 부분은 이러한 동등성이 그저 배경설정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성격, 관계, 직업, 습관, 목표 등 모든 분야에 미친다는 부분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모든 등장인물의 성별을 랜덤하게 반전시키더라도 일부 호칭만 제외하면 본문을 전혀 수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일 것 같네요. 이 특성은 단순히 정치사회적인 캠페인성 의미만 가지는 게 아닙니다. 각 인물을 2배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두 인물 간의 관계는 4배 풍성해지고, 결국 이야기 전체는 2^n배 풍성해지지요. 이 이야기의 캐릭터들이 매력적인 것은 이러한 풍성함에서 오는 입체적인 면모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격인 황녀 ‘진원’을 살펴볼까요. 드러난 행적과 대화로부터 묘사해보자면 ‘진원’은 지금은 전쟁 영웅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 전에는 하루마다 남자를 갈아 치울 정도로 문란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도성 10대 부호라 불릴 만큼 성공적인 사업가인 만큼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고요.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면모는 황녀로서의 의무와 기대를 덜기 위해 고의로 꾸며낸 부분이 있었지요. 모황후의 죽음과 관계된 모종의 비밀 때문에 이러한 결심을 한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요, 아직 어린 배다른 누이들을 유난히도 잘 챙겨주고, 임신한 다른 누이는 많은 자매들 중 ‘진원’에게 특별히 의지할 정도로 다정하고 가정적인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피해온 것 역시 자녀가 없으면 (후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제위 경쟁에서 자연히 밀려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그녀가 전장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사랑에 빠지고, 또한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 탓에 더한 죄책감을 지고 돌아왔는데, 운명의 장난으로 그와 재회하고 또 결혼하게 되면서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지요. 대외적으로는 새로 생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이상은 정치적으로 소극적인 행동만을 취할 수 없게 되고, 내면적으로는 진작에 사랑에 빠진 상대이자 실제로 결혼한 남편이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원한(남편 쪽이 가진) 때문에 냉랭하면서도 얼핏 적대적이기까지한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 탓에 졸지에 결혼하고도 오랜 시간 독수공방하게 되어 성적인 욕구 면에서도 번민하고 있고요. 이쯤 보면 이 인물의 각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두고 남성적이네, 여성적이네 따지려 드는 게 얼마나 한심해지는 일일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세계와 이러한 인물관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는 작가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식상한 구도의 이야기라도 이러한 세계 속에서라면 톡톡 튀는 장면들이 연출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일종의 번외편 격인 ‘황제폐하의 주방’ 역시 평범하고 익숙한 세계관 속에서라면 그렇게나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님의 열일(…)과 장수(…)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충성충성충성 작가님 사랑합니다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