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원주율. 가끔 영미권 영화의 공대 너드들이 떠드는 장면에서 파이데이 어쩌고 하는 것을 본 것을 뺀다면, 중학교 수학시간 이후로는 거의 듣지 못했던 단어다. 원의 지름과 둘레를 재고, 둘레를 지름으로 나누면 반드시 3.14어쩌고가 나온다던 바로 그 단어. 그런데 원주율 학회라고? 이걸로 단편 소설을 쓸 수 있단 말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원주율 학회에 발을 들였다.
문학 속에 녹여낸 수학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한스 마그누스 옌첸스 베르거-나는 초등학교 때, 시험에 내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속아 이렇게 말도 안되게 긴 저자 이름까지 외운 전적이 있다-의 「수학귀신」을 상상했지만, 놀랍게도 이 작품의 작가는 기본 개념만 가져와 꽤나 흥미로운 소설을 완성해냈다. 게다가, 소설의 내용 뿐 아니라 작가 코멘트조차 소설의 일부분인 것처럼 느껴져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수많은 수학적 개념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가득했던 작품인 「수학귀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필자로서는 어라? 싶다가도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이 작품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문장의 첫 단어를 초록창에 검색한 것을 빼고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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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7592… 소수점 아래, ‘무한한 수의 배열 속에서 유한한 정보를 추출해 내는’ 이 작품 속의 원주율학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배출해 낸다. 모든 것에는 당연하게도 미래가 포함되어 있다. 현재를 사는 이가 미래를 미리 아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는 일. 그는 사회질서를 지키는 집단인 ‘자연상수학회’의 표적이 되고 만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그답게, 자연상수학회에서 보낸 이가 할 행동을 모두 예측하고, 심지어 자신의 예견된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기묘한 행태를 보인다.
여기서 잠시 의문이 들었던 것이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예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죽음마저 받아들인 것을 ‘애쓰다’ 세 글자로 줄이는 것이 미안한 일이긴 하다.-
문과도 이해할 수 있는 원주율학회에 대한 글을 써 주신 작가님께 감사를 드린다.
네이피어 상수와 무궁한 영광이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