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의 존재와 지구인의 조우는 다양한 방법과 갈래를 통해 매체에서 그려지곤 했다. 영화 〈ET〉와 〈컨택트〉 등의 SF 영화에서는 인간과 외계의 생명체가 마주하는 장면이 중요하게 또는 부수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마블 히어로 시리즈 같은 대중적인 영화에서도 이미 외계인은 큰 이질감 없이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지구 밖의 이들을 만났으며, 그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SF에서 뜨겁게 다루어지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궁극적으로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 역시 다양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
현재의 과학소설에서는 이미 하나의 관습처럼 쓰이는 외계인의 모습과 접촉의 방식에 대해 늘 신선함을 부여하고자 애쓰고 있으며 기존의 굳어진 틀을 깨고자 하는 방향성이 보인다. 새로운 외계인과의 접촉 방식을 대하는 작품들이 무수히 만들어진다. 우주에서는 어떻게 지구의 통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는 외계인이 어째서 자꾸만 지구를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 이상한 언어의 주문이 없더라도,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그들’의 모습이 달라 실망스럽더라도 우주로부터 오는 방문자들은 끊임없이 지구의 문을 두드린다.
여기, 케임브리지에서 시작된 전파 신호를 찾아 지구로 온 귀여운 외계인이 있다. 휴대폰 불빛을 잘못 보고 한국에 불시착한 귀여운 외계 생명체 버디를 통해 작가가 처음으로 쓴 SF 단편의 맛을 느껴보자. 그리고 그 나아갈 길과 가능성에 대해 점쳐보자.
안녕, 버디.
해수달 작가의 첫 SF 단편 〈마이버디〉는 전형적인 진행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단편은 미국에서 출발한 신호를 보고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과 한국의 소녀가 만나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버디는 ‘칼리’라는 미국의 소녀를 만나기 위해 지구로 향했지만, 스마트폰 불빛을 칼리의 신호로 착각하고 한국에 비상착륙한다. 설상가상으로 착륙 도중 속도 조절을 실패하는 바람에 우주선은 고장 나고 만다. ‘칼리’가 아닌 ‘선영’을 만난 버디의 고난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버디는 “풍선처럼 매끈한 파란 피부, 이마에 솟아난 두 개의 촉수, 짧은 팔다리, 얼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커다란 눈”을 가졌다. 그리고 버디를 처음 발견한 선영은 한국의 소녀이며 아버지에게 지속적인 가정폭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버디는 이런 선영의 ‘구원자’가 되며 우주에서 지구에 도착한 ‘친구’이자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소설이지만, 생각보다 재미있는 과정이 안에 담겨 있다.
먼저, 이 두 명의 인물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부여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소설에서 정확한 자리에 놓여 있을까.
버디는 독자들에게 대단히 특징적인 인물로 다가간다. 외계의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디는 얼마나 ‘외계인스러울까’? 버디는 위에 묘사된 것과 같은 독특한 외모를 지녔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지구의 말을 해독해주는 헤드셋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헤드셋을 쓴 외계인을 한번 상상해보자. 걸림돌이 없이 하나의 이미지가 머리에 떠오른다. 헤드셋은 ‘지구에도 있는 물건’이며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헤드셋’이라는 소재는 독자의 상상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너무 익숙한 물건이다. 버디의 청각기관은 인간과 같은 구조일까. 그리고 우리처럼 그들도 청각기관을 두 개 가지고 있을까. 헤드셋은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뜻인데 버디의 청각기관도 머리에 존재할까. 외계인에게 ‘머리’란 어느 부분일까.
나는 버디의 생김새와 그 모습을 상상하며 이 단편을 읽었다. 촉수와 큰 눈에 대한 묘사는 버디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계인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미디어의 그것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SF를 쓰며 반드시 전혀 새로운 외계인을 구상할 필요는 없다. 사실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외계인’을 낯설게 표현할 필요는 있다. 적어도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낯설게 표현하기의 첫걸음은 ‘인간이 사용하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눈을 ‘시각기관’으로, 귀를 ‘청각기관’으로 표시하는 등의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낯선 느낌을 줄 수 있다. 외계의 존재는 그 움직임과 특성을 한두 개만 독특하게 만든다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신선한 소재가 된다. ‘외계인’과 인간의 조우에서 외계인의 생김새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우주의 존재가 지구의 생명체들과 같은 방향으로 진화했을 확률은 얼마나 될지 상상해보는 것도 SF를 읽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버디는 ‘우주’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묘사한다. ‘우주 정비소’, ‘우주 상점’ 등의 이야기 역시 ‘헤드셋’과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그것들은 우주 밖의 공간치고는 상당히 지구와 비슷한 용어로 불린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우주 정비소’에서는 무엇을 고칠까. ‘우주 상점’에서는 무엇을 팔까. ‘우주 보험사’는 무엇을 보장해줄까. 이에 대한 호기심이 소설을 읽으며 뚜렷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모두가 지구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주 정비소는 우주선을 비롯한 장비를 고치고, 우주 상점에는 대략 이런저런 물건을 팔 것이며 우주 보험사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들을 보장할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양면성을 지닌다. 매끄러운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인 동시에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소설은 전자에 가깝다. 지구와 우주의 공간이 비슷하다는 것은 독자의 쉬운 상상을 돕는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버디가 살던 우주가 몹시 궁금하다. 우주에만 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지 않을까. 독특한 상상력이 우주에서 펼쳐진다면 독자들은 훨씬 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버디는 선영이 겪지 못한 신비한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시도가 된다. 지구에는 없는 무언가가 우주에는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우주의 공간성은 외계인과 지구인의 조우를 흥미롭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칼리, 네가 날 불렀잖아.
나는 이상하게도 이 소설에 직접 등장한 어떤 인물보다도 ‘칼리’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칼리’는 왜 우주로 메시지를 보낸 것일까. 버디가 칼리를 만나러 온 이유는 무엇일까. 버디가 받은 메시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행성과 행성, 은하와 은하를 오가는 일이 버디에게는 작은 불빛만을 보고 실행에 옮길 만큼 쉬운 일이었을까. 칼리와 버디의 사이에 어떤 통신의 연결고리가 존재했기에 버디는 지구로 향해야만 했을까.
버디는 한국에 불시착한 것 치고는 미국에 급하게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버디가 미국으로 먼저 가는 것이 아닌 보험사의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일단 향하는 것은 독특한 전개다. 게다가 버디와 선영이 다시 만났을 때, 버디는 아직 칼리를 만나지 않은 상태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버디에게 ‘칼리’를 만나는 일이 그다지 급하지 않은 것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칼리에 대한 궁금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버디는 칼리와 선영이 같은 나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연일까.
나는 칼리가 이 소설에서 꽤 매력적인 인물로 쓰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미국과 한국은 그 거리가 꽤 떨어져 있다. 휴대폰 불빛을 보고 ‘우연히’ 도착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무작위로’ 만난 선영이 버디가 만나고자 했던 케임브리지의 칼리와 같은 나이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선영과 칼리의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었으리라는 충분한 이유에 기반한 호기심이 생긴다. 이 소설의 후속에서라도 나는 칼리에 대한 정보를 더 듣고 싶어졌다. 칼리는 버디가 지구로 향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구해줘, 구해줘, 버디.
인물을 개략적으로 보았다면 이제 플롯을 살펴보자.
이 소설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버디가 지구에 찾아온 초반’, ‘버디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중반’, ‘버디가 우주로 돌아가고 다시 지구에 오기까지의 후반’. 큰 틀에서 보자면 〈마이버디〉는 ‘구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선영은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으며, 버디는 우주에서 온 존재로 선영을 구출할 힘을 가지고 있다. 선영의 아버지는 선영이 버디를 따라가는 것에 대해 충분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버디는 선영을 구출해야 할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출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구원의 과정에서 독자들은 당연한 의문을 갖는다. 왜 버디는 선영을 한 번에 구하지 못했을까.
선영은 버디와 함께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던 중 자신을 두고 버디만 우주로 돌아가는 상황을 마주한다. 선영의 아버지는 평소 폭력적으로 그녀를 대했기에 버디만 지구를 탈출하는 장면은 선영이 아버지의 폭력에 다시금 노출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작가가 조금 더 섬세한 인과성을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영을 아버지의 폭력에 재노출시키는 것은 소설에서 과연 필요한 장면이었을까.
버디는 우주 보험사의 도움을 받아 잠시 우주에 돌아간다. 그리고 선영은 매일같이 버디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에는 무수히 많은 그리움이 내재되어 있다. 나는 버디가 선영을 위해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안전하게 선영이 버디를 기다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 버디의 초인적인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버디가 ‘구조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칼리와 선영의 아버지는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이 소설에서 중요한 서사적 장치가 될 수 있었지만, 그에 비해 크게 강조되지 않았다. 단편 소설은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하나하나의 인물이 소설의 결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는다면 인물이 많이 등장할 수 없는 분량이기 때문이다. 한 명의 인물은 소설에 큰 전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칼리와 선영의 아버지도 그렇다. 칼리는 ‘버디가 지구에 방문하는 목적’이 되었으며 선영의 아버지는 ‘선영이 우주로 탈출해야 하는 목적’이 되었다. 이는 분명히 소설의 전개 방향에 있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두 인물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인과성에 주목하며 작품을 보완한다면 보다 촘촘한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젠, 미국으로.
미국으로 향하는 버디와 선영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이 소설은 시리즈의 첫 편과 같은 여운을 독자에게 남긴다. 버디와 선영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칼리를 만난 이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귀엽고 푸른 외계인 버디를 독자들은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매일매일 우주에 닿는 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어.”
버디가 지구에 방문한 첫 번째 목적은 칼리였을지 몰라도, 두 번째 목적은 선영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둘은 세 번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지구의 방문자이자 이방인인 버디와 상처가 있는 선영은 서로에게 충분히 좋은 친구이다. 사실 둘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유일한 관계이기도 하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 따스한 여행에 함께하며 둘의 우정을 응원하게 된다.
하나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문체나 진행의 매끄러움, 그리고 흥미를 끄는지 여부를 소설을 읽는 내내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확인한다. 〈마이버디〉에서는 작가가 작품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는 작가에게 마음이 가기에 이 소설을 읽은 것에 대해 확실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해수달 작가의 장점은 작품의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따뜻한 눈과 읽기에 걸림이 없는 문장에 있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많기에, 소설 안의 세상을 구축하는 작가 특유의 시선과 부드럽게 흘러가는 문장의 이어짐은 창작에 있어 분명히 긍정적인 가속도를 붙여 줄 것이다.
이제 출발하는 작가의 첫 소설을 응원한다.
과감히 여행을 떠난 선영처럼. 당신의 여정에도 버디와 같은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