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세기말의 향수가 있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설령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렇다. 1999년 12월 31일이라는 날짜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밀려드는 감정이라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 인간은 시간에 지배당하는 족속이며,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운 좋게도 옛천년과 새천년의 언저리를 살았고 살아가며 살아갈 이들이므로.
향수에 끝나지 않고 광기에 물든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지나왔으니 향수이지 당시엔 어둠에 가까운 무언가였을 것이다…세기말이란 것은 말이지. 글을 읽다가 사이비 종교 ‘광일교’의 등장에 검색창을 찾은 이유는 그래서이다. 정말 있는 줄 알았다. 세기말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굳게 믿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소중한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해친 광신도들이 있었으니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하연은 그런 이야기에 등장할 법한 광신도 중 하나이다. 광일교라는 종교는 우리가 가진 세기말 종교에 대한 지식에 부합한다. 하연은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성으로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믿는 것이다. 공포와 광기에 휩싸여 믿는 것이다.
그러면 세기말에 광신도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갑자기 지구를 지키겠다며 슈퍼맨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믿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경고한다. 당연히 대다수 사람은 듣지 않는다. 믿는 이들은 저들끼리 뭉쳐 멸망에 대비한다. 식량을 쟁이고 방공호를 알아둔다. 외부 요인에 의해 멸망할 바엔 스스로 죽겠다며 자살하기도 한다.
하연이 택한 행동도 큰 범위 내에서 볼 땐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의 마지막 날, 하연은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1999년의 마지막 밤,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결과론적인 관점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정말로 지구가 멸망하는 날엔 방공호 따윈 무용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짧고, 영웅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구 멸망에 무력한 하연이 고작 제 소박한 사랑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결과만 보면 하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을 했는데 말이다. 지구가 멸망한단 중대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글을 쓰려고 상경한, 제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작고 작은, 어쩌면 광일교의 교리에도 어긋날지 모르는 일이다. 거대하고 중요한 세기말의 밤에!
그렇지만, 그렇다면 달리 무엇을 해야 했던 걸까. 우리가 만약 내일 멸망한다면. 마음도 전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사로잡혔다면.
그리고 무사히 시간이 흘러 내일이 어제가 되고 몇 주 전, 몇 달 전, 몇 년 전, 수십 년 전이 된다면 우리는 그 밤을 어떻게 추억할 것인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문장처럼 무궁화호를 네 시간 넘게 타고 와 흘린 눈물 또한 지나간다면.
새천년하고도 수십 년이 지난 오늘 밤, 하연과 믿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순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