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비슷한 소재로 비슷한 주제를 가진 이런(?) 소설을 쓴 적 있었어요. SF를 장르로 선택한 작가에겐 지나칠 수 없는, 한 번은 쓰고 말 소설이죠.
인간의 문제와 미래를 결합시킬 때 접근할 수 밖에 없는 사랑과 죽음의 주제. 그리고 미래를 상상할 때 결국 짚고 넘어 갈 수 밖에 없는 안드로이드. 인간과 관계의 문제에서 극단으로 치달으면 회귀될 수 밖에 없는 ‘인격’의 의미. 인간의 가치.
안드로이드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조종하기 위해서 인간과 최대한 근접하게 설정하는 안드로이드로 인해 되짚게 만드는 ‘인격권’의 정체성과 범위, 한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미래가 실현시킬 기술 발전을 목도하기 전에 부지런히 관념을 다지고 키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처럼 산업화란 문명과 과학 발전의 뒤에서 너무 느리게 움직인 가치-관념의 결과로 발생하고 있는 환경 오염 문제들을 처리하지 못해 생태계가 썩어서 곪아터지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게 되겠죠.
황우석 박사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새끼양 돌리를 복제하면서 생명 복제에 대한 윤리 문제에 봉착했던 그때처럼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는 데 비해 인간의 가치 정립은 항상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이었습니다.
기술 발전과 가치 사이의 간극 때문에 생기는 가치 혼란과 아노미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차치해도 다행히 우리는 현실보다 항상 앞서 왔던 문학의 장에서 끊임없이 예상 문제를 풀어보듯 예습을 열심히 해 둘 수 있습니다.
그게 문학이 유물론적 세상에 기여하는 한 방식이고 문학의 가치를 입증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쓸모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글쟁이들의 가치 증명이기도 합니다. 소비하는 문학으로서뿐만 아니라 세계를 선의 방향으로 순환하게 일조하는 직업(?)의 하나로서 소설가가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니 상부상조하는 것이죠.
세계와 소설의 공생은 그렇게 의미를 획득하고 미래를 열어갑니다.
작가님이 쓴 로건과 조이라는 안드로이드의 관계에서 사랑이란 게 인간의 물적 한계를 넘어서 정신적 가치를 얻게 되는 결말을 봅니다. 결국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세계에서 ‘생명’의 정체성이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 정신적 공동체의 의미로 확장되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조이의 이름의 의미처럼 말입니다.
로건과 조이라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특별히 정의한 작가님의 소설 결말에서는 느껴지는 게 많았습니다. 인간이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다면 그 안에 담길 생명들은 가장 큰 것으로 확대되어야 이상을 지향하는 인간이 인간이란 주체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서 권리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논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를 점한 인간의 권리이자 책임과 의무라고 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해 주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