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연인 님을 알게 된 것은, 이곳 브릿G에서였다. 이분은 누가 대체 읽기나 하는게 맞는가 싶은 내 글에 어디에선가 찾아와서, 작품마다 공감을 박아주고 별점도 주시며 관심을 표명해주셨더랬다. 그래서 나는 그저 백골이 난망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의 상태가 되어, 이분의 행적을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분이 어마무시한 다독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릿G에 올라온 작품은 전부 홀로 모니터링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굉장한 독서량. (아니, 적어도, 등록작가분 작품은 전부 모니터링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 가끔은 등록작가가 아닌 분도 모니터링하고 계신 것 같은데, 도대체 그분의 읽은 작품량은 얼마나 광활할 것이며, 구독함은 또 얼마나 빵빵할 것이며, 구독 작가의 끝은 어디일지 아득히 궁금해지곤 한다. 곧 아찔함에 머리를 털어버리게 되지만) 이런 독서량을 가진 사람이 펼쳐낼 세계는 얼마나 재미날 것인가? 그런 궁금증을 안고, 나는 이분의 작품 목록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목록에 등장한 작품은 처음엔 하나였고, 곧 둘이 되었다. 두 번째로 등록된 연재 작품의 제목을 보고 나는 ‘음, 이분이 노리시는 문학상이 보이는군!’하고 빙긋이 미소 지은 후 클릭해 보게 되었다.
덜 된 쌀을 일컬어 밥이라 하는 자는 없다. 밥은 완성된 후에야 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리던 쌀이 다 익은 듯하니, 나는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마치 육체 없는 혼이 제사상을 받들 듯 흠향한 후, 한술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맛에 대해 논할 때가 되었다. (감히, 논할 생각이다. 그러므로 각별히 객관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분저분그분과 이연인 님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딱딱하기 그지 없는 작가란 호칭을 사용하려 한다. 사람이 이렇게 못돼 먹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여정, 시작해 보자.
========그리고 항상 나는 스포일러와 함께 하지
1)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세계관
본작의 세계관은 작가의 전작(이자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인 [낙원과의 이별]과 궤를 같이 한다.
작고 주변국에 치이는 현실의 반도 국가는 이 세상 속에서 속국까지 거느리는 거대제국이 되었다. 세계 최강대국의 원수이자 제일 가는 갑부 – 이 호칭이 20살 밖에 안 된 대한제국의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만 해도 꿈결 같은 일인데, 작가가 제시하는 세상은 더 놀랍다.
전작에 여성의 군복무에 대해 언급된 부분이 있다. 전작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을 위해, 그냥 여자(심지어 황족인!)도 복무를 하는 국가다 정도로만 말씀드린다. 그러나 내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 부분은 저 사소한(?) 부분이 아니었다. 호칭이다.
황제의 자손은 친왕-대군-소군-군으로 위계가 갈린다. 이것은 현실의 중국 청나라와 현실의 조선과도 다른 작위법이다. 청나라에서 황자들은 패륵(베이러)에서 친왕과 군왕으로 봉작을 받는다. 조선의 경우야 다들 아시겠지만 적통이면 대군, 후궁 소생이면 군이다. 작가분이 만들어내셨을 것이 분명한 이 작위법을 보다 보면 어? 하고 느낌이 올 때가 있을 텐데, 느낌이 오지 않으셨을 분을 위해 되묻는다. 뭔가 허전하지 않은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부연하자면, 조선에서는 공주와 옹주라는 호칭을 썼다.
파격적인 호칭이다. 남녀구별 없이 친왕, 대군, 소군, 군이다. 여주인공이 상명군이라고 불리운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탁 하고 무릎을 쳤다. 호칭에서부터 성을 구분하지 않는 세상이 남녀가 평등하지 않을 리 없다.
2) 그런데 그런 세계관이, 로맨스가 목적이라면, 과연 옳을까?
심지어 육체까지 평등(?)한 모양이다. 이후 나오게 되는 (이야기상 매우 중요한 위치의!) 주방장이라던지, 주인공의 모친인 희현대감이라던지, 묘사되는 여자들을 보면 여자라는 느낌이 거의 없다. 술 마시고 숙취해소거리를 찾을 거라는 남대문경시서장(모친)의 묘사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한 번 생각해 보라니까…… 허구헌날 집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다쳐서 드러눕거나 숙취 해소할 국 끓여줄 때에만 딸을 찾는-
여자의 나긋함, 남자의 강건함- 그런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듣기만 해도 쉰내 난다. 시대는 성 구별이 가지 않는 공통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마땅한 종착점으로 여긴다. 여자와 남자의 기술과 능력(혹시 거리낌이 있다면, 능력과 기술로 순서를 바꾸어도 아무 문제없다!)의 뛰어남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고, 차이와 차별은 다른 문제다.
무시무시한 지점을 하나 골라낸다.
비틀거리던 주하가 다시 장의자에 풀썩 주저앉자 경연은 안도하며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고 했다. 별안간 주하가 허리를 잡은 그의 손을 마주 붙잡더니 그대로 경연을 밀어붙여 장의자에 눕혔다. 문자 그대로 까무러칠 듯이 놀란 경연은 예의도 망각하고 주하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주하의 몸은 쇳덩이로 만들어진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어내다 못해 어깨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하는 경연의 손을 꺾어 머리 위로 누른 주하는 발버둥치는 다리마저도 아주 손쉽게 제압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서 나온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완력에 경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해쓱해졌다.
(생략)
“이,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 안 되나? 그냥 임무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3) 상대적으로 추락하고야 만 남주인공의 위상
사실 저 부분의 묘사를 보았을 때, 나는 잠시 눈을 의심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BL인가, 아니면 로맨스 일반 커플인가? 다시 보고 또 봐서 [남자]라는 단어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의 장르가 BL인가 NL(이 호칭이 적절한 건 아니지만, 일단 상대적 의미에서)인가 더더욱 헷갈리게 했을 뿐이다. 차라리 GL이었다면 이렇게나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국경 경비대에서 4년이나 근무했다는 군인 출신의 혼혈 남자가, (나이 여부가 정확히 나온 것이 아니라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경연이 성년인 것은 주하가 성년인 것만큼이나 확실할 텐데) 그것도 성인이, 서생 타입에 가까운 요리사 여성을 완력으로 못 이긴다…
권력이나 위계에 굴복해서, ‘황족에게 거역할 수 없어, 아, 어떻게 하지…’ 상태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왜 작가님은 여주인공의 신체 묘사에 쇳덩이를 넣으셔서 또 날 고통에 빠뜨리시고……
너 소경연 임마, 너 다녀온 거 당나라 군대네. 네 그 힘으론 국경수비대일 수 없다. 군대 다시 다녀와라. 완전 군장 무게 모르냐? 모름지기 남자란 미혼의 평범한 여자를 한 팔에 들고도 부담 없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건 남녀 차별이 아니고, 너희 신체 스펙의 차이다!
남주인공이 어깨가 떡 벌어졌다는 신체 묘사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 준 건 19화에서 보여준 미행자의 체포 그 때 뿐이다. 이상도 이하도 없다.
“걱정 마십시오.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도 대감의 공적을 가로채려고 보낸 간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심문해 보고 날이 밝는대로 대사관으로 넘겨서-”
큰일 났다. 저렇게 말해도 전혀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가만히 냅뒀어도 여주인공이, 또는 이미 퇴역한 주방장님이 나와서 후라이팬, 아니 젓가락만 던졌어도 후드려 잡을 것 같다.
이 글에서 불행히도 이 남자의 가치는 예쁜이다. 다정한 예쁜이. 그러고보면 1화부터 미모도 강조된 터다. 큰일이다.
4) 반면, 까칠하지만 매력을 잃지 않는 여주인공
어머니가 대군이지만 다정한 아버지를 선택하여 자신의 지위가 군에 한정된 여자. 그나마도 그 아버지란 존재가 불령인인 덕에 그 좋아하는 요리도 못하고 있는 여자. 유능이 흘러넘치는 여자. 심지어 돈까지 흘러넘치는 여자!
이 여자, 이주하는 어딜 봐도 매력 덩어리다. 첫 등장의 덤덤함도 담백해서 좋다. 2화에서 신통력(?)을 발휘하여 남주인공을 놀려먹는 것도 좋다.
“호민 출신, 부친은 통사관이고 모친이 카리야인이겠군? 정확히는 반쿠 카리야가 고향이겠지.”
“그,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생략)
“이 모든 건 그냥 해 본 소리이고, 내가 매년 조당에 입성하는 젊은 남자들의 신상을 빠짐없이 꿰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몇 년만 지나면 혼인하라고 주변에서 잔소리가 늘어질 테니 슬슬 신랑감을 물색해 봐야 하거든.”
영리하고, 독설적이기도 하다.
“내가 언제 책이 읽고 싶다고 했나? 당장 내일부터 식당가를 돌아다니면서 요리를 탐색하려면 카리야말 한두 마디 정도는 배워야 할 거 아닌가.”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더더욱 서두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 임무 중 하나가 대감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도록 통변을 해 드리는 일 아닙니까. 더군다나 언어는 당장 익히겠다는 마음을 먹는다고 그리 쉬이 익혀지는 게 아닙니다. 오늘은 푹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시는 게-”
“아, 그래? 그럼 자네는 세리스리아 요리에 기본 중의 기본으로 들어가는 루를 카리야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나? 아니면 닭가슴살이나 닭모래집을 각기 뭐라고 부르는지는? 또 시장 어디에 바질이나 타임, 오레가노 따위의 향신료를 파는 가게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면 찾을 수는 있고?”
“……아니오.”
그 와중에, 통도 크다.
“이…… 이건 너무 과합니다! 고작 아이들 장난감에 4천환이라니요? 두 벌이면 8천환 아닙니까? 저는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무르시는 게……!”
(그리고 우리의 여주인공은 시크하게, 무시한다)
얼마나 유능한지, 먹은 음식은 하루 만(정확하게는 18시간만)에 재료의 배합마저 알아낸다. 신비한 힘은 덤이다.
“신력도 쓸 줄 아십니까?”
“조금은. 조모께서 성종소황제 폐하의 걸출한 자질을 물려받은 덕에 수신의 은총이 나한테도 약간이나마 닿았거든.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손등도 다치지 않았나? 보여줘 보게.”
(아, 이 신비한 힘 때문에 혹시 경연이 주하를 뿌리치지 못하고 몸싸움에서 밀린 건가? …아냐,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림이 아니다. 작가님…!)
게다가 본인도 본인의 잘남을 안다. 오죽했으면 본인이 황비감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해결책을 알고 있는 문제에 대한 답을 왜 또 다시 찾으라고 하셨을까? 그토록 드시고 싶어 했던 국수를 찾아내 대령하는 역할을 맡겨서 황상에게 호감을 살 수 있게끔 판을 깔아 놓으신 거야. 그러면 여기서 문제, 황태후 폐하는 왜 내가 황상의 눈에 들기를 원하셨을까?”
그런 모든 능력을 가지고도, 보상으로 선택한 것이 하나였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매력들이 춤을 춘다, 춤을 춰. 이 여자, 갖고 싶다.
5) 혹시 2부에선 살 빠지고 매력 넘치게 된 황제가 누나를 노리며 삼각관계로 접어드나요
작가가 1부 끝을 선언하며, 부모님의 이야기를 할 듯 말 듯 떡밥을 던지며 연재가 종료된 이 시점에서, 나는 다른 건 둘째치고 다시금 남주인공의 부족한 매력을 한탄하며 땅을 치는 것이다.
황비 계획이 여주인공의 망상이거나, 그냥 맥거핀으로 끝내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황제가 세상을 다 잃은 듯 식도락에 탐닉했는데 (아차,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를 위에 언급하려 했는데 잊었다. 아버지와 황제의 배경 묘사도 부족하다 생각한다! 작품 소개에는 분명 통치권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정작 본작에는 통치권 회복에 대해 다뤄진 부분이 없다. 그냥 아버지가 유학 잘못 갔다가 불령인이 된 정도의 묘사가 전부이다. 주하가 저렇게만 알고 있을 뿐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다- 라는 것이라면, 이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 2부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라 본다) 국수 맛을 보고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주방장과도 연계되고, 뭔가 격한 권력암투물이 될 것이라 예상해 본다.
그렇다면야! 이왕이면 나온 것도 조금인데 그 등장마저 얄궂은 황제가 살 좀 빼고 황제로서의 완숙미(?)를 풀풀 풍기며 육촌 누나를 노리길 소망한다. (왕실혼에서 근친혼을 빼면 남는 거 없는 거다) 너, 나한테 찍힌 소경연, 노력 좀 해야 할 거다. 난 네가 주하를 데려가기에 모자람 없는 남자인 걸 보고 싶도다!
6) 이 모든 점을 종합해 보면, 여러분에게 산남식 고기 국수보다 더 매력적일
뭔가 분석하기 시작하면 이놈의 성격 탓에 항상 은혜를 원수로 갚음을 한탄해 왔는데, 오늘도 그 기질 못 버렸다. 내가 이렇게 오늘 또 인간관계를 잃는다……
이연인 님이 나를 잃는(?) 대신,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을 얻기를 소망한다.
남주 깠지만 한 번 봐라.
여주 맘에 들면 두 번 봐라.
권력 암투물 맘에 들면 세 번 봐라.
그리고 소경연 이 자식 너 그냥 팍 씨, 그냥 확 마!
—5월의 첫날, B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