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에 올라온 SF 중에서 인상 깊게 읽은 작품 중 하나이다. 이유는 이 작품이 꽤나 하드(hard)한 SF이기 때문이다. (재미있었던 또 다른 하드SF로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가 있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과학 지식으로 점철돼 지루하고 딱딱한 작품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따뜻한 감성이 흐르고 있고, 인간의 본성과 감정이 무엇인지, 생명의 가치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고향인 지구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는 달처럼 지구 주위를 도는 작은 천체가 발견되는 데에서 시작된다. 분석 결과 천체는 지적생명체가 남긴 인공물이고 일종의 기록 보관 장치였다. NASA는 비밀리에 그것을 수거해 와 안에 기록된 정보를 꽁꽁 숨기지만 미국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겠다고 발표하자 NASA 관계자가 그것에 유감을 표하며 그간 극비에 부쳤던 해당 정보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무엇이 기록돼 있었을까? 2화부터는 기록보관소에 탑재된 인공지능 ‘아에록’의 독백으로 이야기의 물꼬를 튼다.
독백을 듣자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된다.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온난화가 진행된 지구, 이산화탄소 농도의 급증, 해양의 산성화, 해양 생물의 멸종, 인류의 멸종, 우주로 수분이 손실된 지구, 손가락 개수에 따라 인종이 분류되는 인류 사회, 인종 간의 차별과 반목과 전쟁의 역사들……. 미래에서 날아온 경고 메시지일까? 아니면 지구라는 또 다른 이름의 외계 행성의 과거 기록인 걸까?
어쨌든 그들이 지구라고 부르는 행성에는 인류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아니다. 두 명이 남았다. 정확히는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정거장에 남자 아이 하나와 여자 아이 하나가 남게 된 것이다. 두 아이는 손가락 개수가 다르다. 다른 인종인 것이다.
아에록은 지구 멸망 전 루오에스라는 여성 과학자에게서 인간의 감정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을 인지할 수도 있고 아에록 본인도 여러 종류의 감정을 느낀다. 그리하여 아에록은 매정하기 짝이 없는 AuTX라는 또 다른 인공지능과 함께 지구를 테라포밍(!)하는 와중에 우주정거장에서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까지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에록이 과거에 감정을 학습한 게 큰 도움이 되는데 두 아이가 커 가면서 겪는 고민들, 이를테면 서로를 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 하는 문제라든가 결국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 상대가 죽는 순간에 느끼는 상실감 등을 공감하며 도와주려 애쓴다.
아이들은 결국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 하고 모두 떠나게 되고(아에록도 상실의 고통을 겪는다) 아에록은 아이들과 루오에스를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테라포밍에 박차를 가한다. 지구에 생명체가 생겨나고 진화가 이루어져 인류가 등장하게 되면 그들 중에 루오에스와 아이들이 다시 태어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에록과 AuTX가 지구를 살리려는 노력은 온 우주의 자원과 과학 전 분야의 지식이 동원된다. 소행성을 지구에 충돌시켜 소행성에 포함된 칼슘으로 지구의 이산화탄소를 감소시키기도 하고, 생각보다 기온이 내려가지 않자 소행성들을 몇 번 더 충돌시켜 지구 대기에 먼지 구름이 뒤덮이게 만들어 기온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한 소행성대, 나중에는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서 물을 운반하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유로파의 바다에서 미생물이 발견돼, 그것들을 멸종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물을 가져오겠다는 AuTX와 그것에 반대하는 아에록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둘은 수시로 티격태격 다툰다)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둘의 노력으로 어찌어찌 테라포밍이 진행돼 지구에 서식(?)하는 생체형 인공지능들이 깨어나게 되고 이들이 지구 생명체의 진화를 담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구는 녹조류에서부터 시작해(그들의 주요 역할은 산소를 만드는 것이다), 단세포 생물과 원시적인 생물들을 거쳐 점점 고도로 진화된 커다란 동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는 뭔가를 깨닫게 된다. 소설의 지구와 우리가 현재 사는 지구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은 대체 역사 장르로도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과연 인류의 진화에 성공했을까? 우리가 그들의 후손인 걸까? 그렇다면 인류가 일으킨 지구 온난화와 생물의 대멸종과 인류 집단 간의 분쟁을 목도하는 현재,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공지능들의 고군분투는 작품에서 줄곧 담담하게 표현된다. 까딱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거나 혹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테라포밍 작업이 엄청나게 고되고 험난해 보이지만 인공지능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이고, 논리적인 계산에 따라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해결책을 시도하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물론 루오에스를 다시 만나고자하는 아에록의 열망도 큰 역할을 한다.
그가 루오에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엄마에 대한 아이의 애착에 맞먹는 수준이다. 그래서 독자도 아에록과 루오에스의 재회를 응원하게 되는데 마지막 화에 묘사되는 아에록의 모습에서 가슴이 저릿해지고 말았다. 이유는 읽어보시면 알 듯…….
테라포밍은 SF에서 종종 다뤄지는 소재 중 하나다. 대부분은 인류가 외계행성을 테라포밍하는 이야기이다. 간혹 지구를 테라포밍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테라포밍하는 주체가 인류(혹은 이 이야기에서처럼 인류에게서 임무를 지시 받은 인공지능)가 아닌 외계인이다. 그런 점에서 인류가 지구를 테라포밍하는 이 작품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작품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것은, 왜 하필 지구였냐는 것이다. 어차피 지구는 다 망가졌는데 좀 더 성공 가능성이 높은 다른 행성을 찾아서 테라포밍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 같다. 사실 테라포밍이라는 게 여러 작품에서도 쓰이고 인간의 상상력과 개척 정신을 자극하는 면도 있지만 실상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작업이다. 혹자는 그 돈을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는 데 투자하면 훨씬 효과적인 결과를 낳게 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은 인류의 우주 탐사를 적극 장려하고 금성과 화성의 테라포밍에 대해 제안하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아이디어가 그리 탐탁치가 않다. 우리는 일단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땅부터 소중히 여기고 아껴야 하는 게 아닐까? 지구의 자원을 흥청망청 다 파서 써 버리고 산과 바다를 잔뜩 더럽혀 놓은 다음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 살면 그걸로 장땡인 걸까? 그렇게 인류의 발자취마다 회복 불가능한 폐허를 남겨놓는 식으로 우주를 떠돌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점에서,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 입각해 각국 정부들이 출산을 장려하는 모습도 마냥 좋아보이진 않는다. 급감하는 출산율은 어쩌면 인류가 본능적으로 발동시킨 제어장치인지도 모른다. 지구의 생명체들은 자연 상태에서는 먹고 먹히는 과정에서 적절한 개체수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거기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생물종이 바로 인류와 인류가 키우는 가축이다. 이들은 천적이 없기에 짧은 기간 동안 개체수가 급증했고, 그 결과 다른 생물종들이 대거 멸종하고 있으며 인류와 가축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가 지구 온난화를 허리케인 수준으로 부채질하고 있다.
또 하나 생각할 거리는, 루오에스는 왜 아에록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켰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테라포밍이 굉장히 정교한 기술과 판단이 요구되는 작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감정이라는 부분이 그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당장 유로파에서 물을 가져오는 문제만 해도 아에록은 유로파 바다의 생물들이 멸종될 거라는 생각에 선뜻 그 계획에 동의하지 못 한다. 하지만 물이 없으면 지구에서 생명이 살아갈 수가 없다. 아에록이 이런 식으로 중요한 순간에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 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아에록이 감정을 학습한 일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소설 후반에 나온다. 인공지능들이 결국 포유류와 인류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시 인류가 단순 영장류에서 진화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능보다도 감정이 더 중요한 요소임이 밝혀진다. 현대인들의 공감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들려온다. 그 결과로 이미 여러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졌고 이게 점점 확산되면 인류의 미래가 어찌될지 상상도 하고 싶지가 않다. 어쩌면 인류 사회와 달리 인간 자체는 퇴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벼랑 끝에 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이런 작품도 읽어보고 잠시라도 지구와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기사에서 (몇 년 전의 기사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SF독자가 500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했다. 아마 요즘은 SF작품이 꽤 많이 출간되고 인기도 좋아서 그보다는 숫자가 늘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은 여전히 SF의 불모지인 것 같다. 당장 브릿G만 해도 SF가 판타지나 스릴러보다 인기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요즘 출간되는 SF의 경향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하드SF에 목마른 독자로서는 이런 작품들이 더 많이 쓰이고 출간됐으면 하는 소망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님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다. 행성과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어떤 기술과 지식이 필요할까? 이 소설은 천문학뿐만 아니라, 지질학, 대기학, 생물학, 해양학, 동물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넘나든다. 작가님이 이 작품을 쓰시면서 많은 공부를 하시고 그걸 작품에 모두 녹여내신 것 같다. 지적 욕구가 채워지는 것도 이 작품을 읽으며 느낀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가장 재밌었던 점은 인공지능들이 너무너무 귀엽다는 거다) 작가님께서 마지막 화 다음에 다음 작품의 프롤로그를 올려놓으셨는데 그건 또 어떤 이야기가 될지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