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5년쯤 전 일이네요. 여러차례의 변신 끝에 최근 이마트가 된 신촌 그랜드 백화점 10층인가에 있던 조그만 극장에서 <착신아리> 라는 일본 공포영화를 볼 때였어요. 기분 나쁜 멜로디의 전화벨 소리가 인상적인 영화였죠. 세 줄 정도 앞에 앉아서 그 영화를 보는 내내 깜짝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던 여고생 쯤으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어요.
“아 X발, 좀 가지 말라고!”
극장 안은 감독의 연출력이 무색하게 웃음바다가 되었죠.
사실 그 한 문장이 공포물을 감상하는 우리의 마음을 압축하고 있는 것 같아요. 등장인물이 지금 저기로 가면, 저 행동을 하면, 분명히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죠. 그런데 극의 흐름상 기어이 거기로 가거나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그 일을 당하고야 말아요.
별개의 장르처럼 구분되는 <미드소마> 류에서도 이런 장면들은 예외 없이 등장해요. 신성한 나무에 오줌을 싼다든지,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들어가서 책을 읽는다든지 하는 장면들이요. 감상자는 ‘너 이제 큰일 났다’ 하며 가슴에 성호를 긋지요. 그 큰일이 얼마나 끔찍하게 벌어질지 기대하면서요.
0제야 작가님의 단편 <지도에 없는 마을에서> 역시 이런 공포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어요. 지도를 가진 여행자라면 애초에 지도에 없는 마을에 들어가면 안 되죠. 알 만한 사람이 말이에요.
처음엔 이방인을 환대하는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우리도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죠. 구두를 싼 값에 고쳐주고도 넘치는 호의로 기념품 삼아 작은 금속판을 선물한 대장장이 흘끔 씨도 그럴싸한 초반 분위기 메이커예요. 높은 가격으로 시립 병원에 납품하는 그 금속판이 무슨 용도인지 제작 당사자도 잘 모르니 마을 밖에서 꺼내라는 당부를 덧붙이는 시점부터 운명의 톱니바퀴 아구가 맞아 돌아가기 시작해요. 여관 주인 멸치 씨는 썩 좋은 방을 내주면서 8시 이후에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가요.
하지 말아야 할 일 두 가지가 생겼네요. 기왕에 오지 말아야 할 마을에 이미 들어온 여행자가 이 두 가지의 금기를 지킬리가 없겠죠. 우리가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 봐야 전혀 소용이 없어요. 여행자의 부주의함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궁금해 하며 문장을 읽어 내려갑니다.
시장과 금속판의 정체가 밝혀지는 부분은 상당히 신선하고 충격적이에요. 대충은 예상하고 있던 내용임에도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0제야 작가님의 글솜씨 덕분일 거예요. 자칫 잘못하면 박일도1 같은 설명충이 되기 십상인데, 시장의 목적이나 능력, 과거 행적을 딱 기이할 정도로만 밝히고 글을 마무리 지은 것도 좋았어요.
금속판에 세밀한 패턴이 있다는 묘사에서 왠지 모르게 오르골의 부품을 떠올렸는데, 크게 빗나가지는 않은 것 같아서 혼자 뿌듯해 했어요. 그런데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이 금속판의 모양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급한 대로 크기 부터요. 처음엔 금속판 밑에 쪽지를 넣었다길래 손바닥 크기 정도 되려나 싶었는데, 계속 읽다 보니 엄지 손톱 쯤 되는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 외엔 시종일관 장면들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이 시각적 청각적인 묘사가 뛰어나요. 거리 곳곳에 붙은 붉은 머리의 시장 사진, 대장간의 모습, 인물들의 표정과 말투 등등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요. 특히나 저는 다수의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기괴함을 좋아해서 후반부의 광장 씬이 매우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합창까지 한다니 최고죠.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