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지난 일기’인 작품의 소개글이 ‘설마 매일 일기 쓰세요…?’인 게 어딘지 묘하게 조화로우면서도 우습다. 작품을 읽고, 어릴적 교과 과정에 어째서 꼬박꼬박 일기 쓰기가 포함되어 있었는지 새삼 새로이 의문을 가져보았다. 그 당시에 우리가 쓴 건 일기라기 보다는 한글 또는 작문 공부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를 쓰며 단 한 번도 이게 나의 기록이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 했으니까. 시켜서 하는 일이었고(생각해 보면 당시에 내가 원해서 한 일은 그다지 없기도 했다), 대상 독자는 주로 우리의 주양육자 아니면 교사 정도였다. 나는 일기를 쓰는 내내 이걸 읽을 독자의 눈을 지독하게 의식했다. 이 유일한 독자들은 ‘일기’가 뭘 위한 기록인지를 내게 주지시킨 뒤에도 잘도 그 ‘내밀해야 할’ 기록에 공공연히 개입했다. 일기를 안 빠뜨리고 썼는지를 검사하고, 일기 내용에 자못 어른다운 필체로 빨간 펜이나 파란 펜을 들고 코멘트까지 달아주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는 어느 정도 필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학생들의 정서 발달 과정을 지켜보기에 일기는 괜찮은 수단이었겠지만, 어쨌건 당시의 일기가 ‘일기장의 이야기’라는 저자의 암묵적 주장에는 나 역시 동의를 표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더 나이를 먹고 아무도 내 일기 숙제는 커녕 나의 삶 자체에 이렇다 할 관심을 쏟지 않는 시기에 진입하게 되어 별안간 다시 일기를 쓰겠다 마음 먹게 되는 건 솔직히 강제로 일기를 쓰던 경험 덕택이라 믿는다. 언어라는 게 그렇다. 속에서 쌓일 만치 쌓이고, 또 그게 툭툭 어색하고도 서툴게 비어져 나오는 과도기를 지난 다음으로도 한참이나 더 훈련을 거쳐야 속으로만 맴돌던 말들을 밖으로 수월하게 꺼낼 수 있게 되는 거니까. 어느 날 갑자기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 같은 영화를 보고 돌아와 빈 노트를 펼친대도 당장 떠오르는 말은 ‘Dear Diary’가 고작일 것이다. 혹은 오늘 날짜라든지.
‘방언’ 얘기를 한 김에, 나도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방언이 터진 순간에 관해 잠깐 이야기해 볼까 싶다. 나에게도 잠시지만 ‘단추’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우리는 순전한 우연으로 런던 외곽의 어느 집에서 만났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6살 즈음 먹은 성견이었던 녀석과 나는 약 1년 간 산책/플랏 메이트로 지냈다. 나는 그게 인간이 아닌 존재와 함께 장기간 살아 본 첫 경험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서툰 점이 많았는데 특히 둘이서 나서는 오붓한 산책길이 그랬다. 처음에는 사람 앞에만 서면 무조건 굳고 마는 혀를 푸는 느낌으로 녀석에게 영어로 아무 말이나 중얼댔다(그 애는 고향이 대구였기 때문에 영어를 알아들은 기색은 없었지만, 나 역시 딱히 남이 수월하게 이해할 만 한 영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곳이 주변에서 지나가다 내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 한 공간임을 의식하고부터는 한국어로 언어를 바꿨다. 영어든 한국어든 그 애가 인간 말을 세세히 알아듣지는 못 했을 텐데 그때는 그렇게 무슨 말이든 건네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 번 터진 방언은 술술 잘도 불어났고 녀석이 지구를 떠난 올 봄 이후로 이제는 액자에 꽂아둔 사진에다가도 제법 유창하게(?) 말을 건네게 되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언어에 구애를 받지 않고도 감정을 주고 받는 법을 배웠다. 나 역시 개의 언어를 세세히 알아듣지는 못 했지만, 우리의 공용어는 눈을 맞추고 체온을 나누고, 목소리의 진동수를 높이는 걸로 충분했다. 음, 다른 쪽의 의견을 확인해보기 전이라 단언할 수야 없지만 인간의 입장으로써는 일단 그랬다고 말해 두자.
한쪽 인물의 입장과 시점에 편항돼 전개되는 픽션에 더러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 형식이 회고록일 때는 자유롭게 각색하고 덧칠해 꾸며낸 이야기 전부를 왠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용인하게 되어서인지 한결 읽는 재미가 있다. ‘지난 일기’를 읽으면서는 우선은 《잠옷을 입으렴》 속 수안과 둘녕이 떠올랐고(이 작품은 주로 둘녕의 기억에 기대어 전개된다), 비슷하게 두 친구의 일대기를 그린 《나의 눈부신 친구》처럼 영상화가 되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는데, 원작처럼 대사가 톡톡 튀게 재밌는 각색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곁들여 해 보았다. 언급한 두 작품에 비하면 ‘지난 일기’는 한결 ‘나’의 시선에 집중해서 ‘나’를 둘러싼 혹은 ‘내’가 둘러싼 세계를 되새기는 회고라는 점에서 결국 이 이야기는 일기로 귀결되기야 하겠지만.
일기는 진실일까, 거짓일까? 가끔 이런 고민을 해 볼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그게 중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거의 기록이 함의하는 ‘덮어쓰지 못 한다는 속성’과 미래의 기록이 전제하는 ‘곧 흩어지고야 말 신기루 같은 열망’에도, 우리는 그들에 의지해 현재를 살아간다. 의지하고 견지할 추억과 염원.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오롯이 현재만을 살아가지는 못하며,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때때로 일기가 필요하다.
다시 처음의 주제―’매일 쓰는 일기’로 돌아가서 리뷰를 마무리지어야 겠다. 부지런히 매일 기록을 남기는 이들도 적지 않겠지만, 내 경험상 많은 일기는 그 하루를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 주체가 되는 감정과 상황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오기 전까지 나의 시점이 1인칭 관찰자에 가깝다면, 시간이 충분히 묵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을 가장해 전지적 시점으로 내 기억을 상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삶 전반에서 몇 번이고 거듭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발적으로(내 필요에 의해) 쓰는 일기는 대부분 ‘지난 일기’가 되고야 만다. 그리고 매일 꼬박꼬박 쓰던 일기 숙제와 이 자발적 일기가 달리하는 속성 하나는, 이게 진짜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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