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읽던 책에,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동음이의어가 존재하는 경우 이를 구분하기 위해 한자 표기가 부연되어 있었다. 그걸 어쭙잖게 흉내내어 글을 써본 일도 더러 있었건만, 솔직히 이제 나는 영어 병기가 차라리 더 편하게 느껴지고 매일 더 많은 한자를 잊어버리고 있다(애초에 기억한 분량도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서 ‘인간원’이라든지 ‘조류화’ 같은 제목을 만나면 뿌옇고 막연한 기분을 먼저 느낀다.
<조류화>는 인간에서 점점 조류로 변해가는 어떤 존재 ‘을’에게 다른 인간 ‘갑’이 그물 같이 질기고도 무자비한 손길을 뻗어 옭아매는 관계를 다룬다. 구도의 측면에서 볼 때, 철저히 ‘갑’이 존재하는 현장에서 ‘갑’에게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서술되는 것이 단순히 ‘갑’이 일종의 주인공 역할을 맡고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갑’의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드러내려는 의도인지는 확실히 분간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조류화>는 ‘갑’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을’도, ‘정’도, 전 배우자도, 심지어 ‘나’도 이 무대에서는 종속적 배역으로만 남는다. 덧붙여, 성별을 특정하는 단어가 딱 한 번(엄마)만 등장해서 독자의 상상력에 왕왕 의존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열 명이 읽으면 아마 열 한 명이 다른 풍경으로 상상하게 될 세계라는 짐작이 들어 재밌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종에 대한 환멸을 어느 정도는 이미 느낄만치 느껴 본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분노 속에 들어 앉아서는 이 이야기를 오롯이 감상하기가 어렵다. 너무 화가 치밀어올라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더뎌지기 때문이다(?). 우주의 먼지인 인간들은 무릇 감각적 제약에 구애받기 마련이고 세상에는 너무 멀어서 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너무 가까워서 느끼지 못하는 대상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널리 혼재되어 있다. 내게는 인간의 속성 역시 그 범주에 포함된다고 느끼는데, 나 자신이 이미 인간이기 때문에 내 삶 속에서 오랫동안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인간적 속성에 이제 막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관심을 갖게 된 요즘 같은 시기에 이런 작품을 알게 된 건 어쩌면 신묘한 우주의 기운 덕택일지도 모르겠다.
<조류화>를 읽고 나니 ‘인간원’이라는 제목도 새삼 달리 읽게 된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원》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단편집 속 단편을 읽는 기분으로 <조류화>를 읽었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맵고 아린데 믿기지 않을 만큼 뒷맛은 개운해서 먹는 이의 마음속 스트레스와 묵은 감정을 함께 챙겨 홀연히 사라지는, 딱 그런 기분이 드는 단편이었다. 언젠가 어느 차원에서든(?) 책의 형태로 이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면 그 때는 ‘을’의 무대 위에서 ‘을’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세계도 한 번 구경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