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중세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많은 듯 하면서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왕을 위해 정정당당한 싸움을 청하며 패배에 깔끔히 승복하는 기사도 정신, 철갑옷을 두른 기사, 그리고 거대한 성채는 중세 배경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도 한번 쯤 들어봤을 정도의 소재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경우에 따라 마법이나 용, 오크, 마녀, 고블린 등의 비현실적 존재를 집어넣게 된다면 우리가 어디선가 하나는 봤을 중세 판타지 배경의 클리셰가 완성됩니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완전히 예상을 비틀지, 정석대로 흘러가되 어딘가에 변주를 삽입할지의 여부는 작가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미로와 순례자’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앞서 언급한 작가의 몫 중 ‘정석대로 흘러가는’ 글에 속합니다. 어느 낡은 예배당의 지하에서 발견된 범상치 않은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발견한 국경수비대, 국경수비대의 ‘대장’이 소속에 관하여 묻자 자신은 모든 기억이 없다 답하는 소녀. 이제 이 소녀는 예배당 바깥으로 나온 뒤 국경수비대 소속 대원 중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표면적인 목적은 다를지라도)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날 것이며 그 여행 도중 여러 사건을 겪으며 친구를 만나기도, 적을 만나기도 하며 성장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가장 보통의 중세 배경 이야기가 띄는 줄거리이기도 하며 실제로 적어도 지금까지 이 글의 전개가 흘러가는 방향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 단정짓기에는 이른 글입니다. 아직 서론도 채 지나지 않은 글이니 예상을 비트는 전개가 나올 수 있음은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아직은 ‘보통의 이야기’에 속하니 앞으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뻔한 전개가 나오든 변주가 삽입된 전개가 등장하든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이야기임은 확실하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