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상 작품의 내용과 결말을 언급하고 있으니 미독이신 분은 주의 바랍니다.)
일독하면 불가사의한 여운과 감동에 젖게 되는 작품이다. 그 ‘불가사의함’의 정체를, 개인적 체험과 연관하여 언어화하기 위해 이번 리뷰를 쓴다.
회사의 상사가 ‘일일이 챙겨줘야 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일 관계로도 얽혀 있는 지인인데 극도로 사회성이 없고 평가에 민감해서 당신이 스케줄을 체크하고 컨디션을 파악하여 북돋아주지 않으면 업무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의문이 떠오르는 대로 입밖에 내어 물었다. “왜 손절 안하셨어요?”
무례한 질문이었다는 건 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난하면서 전혀 납득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렇게 ‘손해 보는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지금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손실’을 기피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개인주의와 ‘손절’은 딱히 낯선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귀찮은 타인은 끊어내면 된다. 간단하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관계의 ‘쉬운’ 룰인데도 ‘왜 손절하지 않는가’라는 나 자신이 뱉은 질문은 오랫동안 운동화 속의 모래알로 남았다. 그리고 박부용 작가의 장편 <가짜 예수를 믿었던 악마>에 ‘감동’을 받고 겨우 그 의문을 해소한 기분이 되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지옥, 벨리알과 바알이라는 양대 군주가 전쟁을 벌이는 시대의 접경지대다. 현재시제로 흑백 대비가 선명한 영상적인 도입부를 거치면 이것이 이마에 뿔 대신 박쥐 날개가 달린 특이한 악마 ‘솔로몬’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더욱 특이하게도 그녀는 어머니 아하시야의 유지를 이어 ‘기독교’를 신앙하며 교회를 지킨다. 경건하게 성경을 읽으며 일상을 보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방인이 침입해 들어온다. 벤엘이라는 이름의 이방인은 천국의 전장에서 도망친 탈영병 천사다(작중 ‘악마’와 ‘천사’는 두 종족처럼 취급되며 체제적으로는 대립하는 듯하나, 악마들은 스스로를 열등한 종족으로 여기는 것 같다).
벤엘은 솔로몬에게 숨겨달라고 청하면서도 그녀의 신앙을 공격하고 신경을 긁어댄다. 천사인데도 지극히 냉소적인 그는 기독교적 가치는 허상이고 심지어 신이 이미 없다며 극론을 내놓는다. 처지와 정반대로 적대적인 벤엘이지만 솔로몬은 그가 성경을 근거로 들어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을 부정할 수 없다. 솔로몬은 갈등하면서도 벤엘을 교회 안으로 들이기로 결심한다.
솔로몬이 염두에 두는 성경의 말씀은 작품의 묘비명으로 쓰이는 디모데전서 6:17~6:21 구절이다. 골자는 ‘타인에게 선을 베풀어라’이다. 그녀는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벤엘을 받아들인다. 솔로몬의 심경 변화가 정확하게 그려진다. 초반 1~3화에 걸쳐서 솔로몬의 ‘결심’은 화마다 한 번씩 총 세 번 나온다. 솔로몬이 습관으로만 읽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기까지 세 번의 망설임이 필요했던 것이다. 행동은 단 한 번의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몇 번의 망설임과 재결단의 과정이 필요함을 소설의 문장이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불쑥 침입해 들어오는 폭력적이고 불쾌한 타인으로부터 솔로몬의 시련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침입자는 더 많은 걸 요구한다. 다시금 벤엘의 종용으로 솔로몬은 갈곳없는 빈민들을 교회로 맞아들인다. 규칙을 세우고 성경의 말씀으로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타인들은 솔로몬이 애착을 갖는 책을 땔감 대신 태울 것을 요구하여 솔로몬을 분노하게 만든다. 아들 탄자와 함께 들어온 마냐나는 선량하고 솔로몬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만 병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죽어간다. 벤엘은 여전히 퉁명스럽고 쓸데없는 불화를 만든다.
그들은 이기적인 계산으로 솔로몬을 진력 나게 만들게 하는 한편 선의의 행동으로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소설은 선의를 행하라는 ‘말씀’의 원칙에 이어 또 하나의 원칙을 말한다.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섣불리 재며 그 단면만으로 멀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관계에 얽힌 한 그가 언제 자신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솔로몬은 몇 번이고 불화를 극복하고 속으로 삭히면서 선의를 실행해 나간다.
선의의 실행자인 솔로몬의 반대 인물은 벤엘이다. 서로에게 선의를 행하는 관계의 네트워크를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그는 의무병 경험을 살려 교회 사람들을 돌보지만, 그 자신은 어떤 효능감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표현된다. 그의 좌절은 마냐나의 병세가 악화됨에 따라 심각해진다. 마냐나는 결국 병사하고, 벤엘은 자신이 ‘유용한 일’을 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그러면서 유용한 일을 한다며 서재에 틀어박혔다가 또다시 솔로몬과 말다툼을 하고 결국 탄자를 상처입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까지는 선의에서 비롯한 행동과 실질적 유용함의 가치 대립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이 역설하는 주제는 이야기의 파국 이후에 놓여 있다. 그것은 솔로몬이 회상하는 어머니 아하시야의 수수께끼 같은 발언과 연관된다. 우선 결말을 밝히겠다.
극적인 정세 변화로 교회에 개입한 군이 사람들을 해산시킨다. 벤엘은 좁혀오는 악마와 천사 양쪽의 추격을 피해 행방을 감추지만, 최후의 순간 다시 교회로 돌아온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회 공동체가 맥없이 해체되고 고요한 일상이 돌아온 걸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벤엘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단호하게 거절당한 벤엘은 솔로몬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회에서 자결하고 만다.
이러한 파국으로 일어난 솔로몬의 진정한 변화를 이해하려면 작품 전체에 걸쳐 말씀과 행함 사이의 간극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녀는 처음 벤엘을 교회로 맞이하는 결단을 하는 데도 세 번의 망설임이 필요했다. 이후에도 그녀는 공동체에 말씀을 읽히지만 그대로 실천하는 자는 지극히 드물며, 선량한 마냐나의 행동조차 솔로몬과 벤엘 사이의 충돌을 불러온다. 이 간극은 곧 고통이다.
괴로운 순간에 솔로몬은 아하시야를 떠올린다. 독실한 신앙자였던 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하여 자신을 북돋거나(일종의 연기) 악몽을 꾸며 말년의 어머니가 ‘성경 속 예수는 가짜’라고 단언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머니의 독실함이 딸인 자신을 지키기 위해 ‘꾸며낸 것(이것 역시 연기)’일지도 모른다는 통찰을 한다. 이 회상들은 하나의 주제로 연결된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가짜 예수’의 수수께끼다. 아하시야는 어째서 예수가 가짜라는 결론을 내렸는가?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성경에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예수가 그 수난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하는 구절이 있다. 아하시야는 그 구절에서 ‘말씀과 실천 사이의 간극’이 예수 또한 고통스럽게 했음을 읽은 것은 아닌가. 아하시야 또한 그러한 간극의 괴로움을 알았다면 완벽한 구원자이며 신의 아들인 예수가 그러한 간극을 느꼈다는 데서 위화감을 감지했을 수도 있다. 솔로몬의 통찰이 올바르다면 아하시야는 완전히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다른 목적에서 이를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라는 것은 곧 허위다. 따라서 예수 또한 구원자를 연기한 가짜 예수가 된다.
파국 이후의 후일담에서 솔로몬은 아직도 벤엘을 인정하지 않는 탄자에게 그의 선한 의도를 해설한다. 벤엘의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이때 솔로몬이 말하는 ‘이야기’는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의 최종 해답이 된다. 말씀과 실천의 간극이 가져다주는 건 끝없는 고통과 비극적 파국뿐일까? 예수조차 그로써 고통받는다면, ‘가짜 예수’를 신앙하는 솔로몬의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타인과 허위에 대한 태도가 솔로몬과 벤엘의 운명을 갈랐다. 답은 ‘연기한다’는 것의 의미에 있었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타인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디모데서의 ‘말씀’에서 비롯한 인간관계의 원칙은 ‘타인의 모습을 자신의 잣대로 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행위의 고통과 허무함에 대한 항체는 생기지 않는다.
애초부터 신앙을 냉소했던 벤엘은 ‘진정한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함은 타인에게서 오는 것(타인이 원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비롯했다. 그가 타인을 생각했다면 그들에게 나름의 의료적 도움을 주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유용함’의 기준에 얽매였기에 끝까지 ‘쓸모없는’ 행동으로 치달았다.
이에 반해 솔로몬은 끝없이 타인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것이 끝내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닿았을 때 ‘연기한다는 것’은 거짓되고 허망한 것이 아닌 진정한 윤리적 가치를 드러낸다. 작품의 마지막 두 문단을 그대로 가져오자. “솔로몬은 벤엘이 최후에 상상한 그녀의 삶을,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서 받아들인다. / 그것이 비록 고통스러운 삶일지라도 말이다. 솔로몬은 교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평생 동안 가난한 자들을 돌보면서 살았다.” 아하시야가 그랬듯이, 그리고 ‘가짜 예수’가 그랬듯이 그녀는 연기함으로써 ‘진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벤엘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그녀의 책무다.
<가짜 예수를 믿었던 악마>라는 제목은 따라서 간결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주제 그 자체를 꿰뚫고 있다. 가짜 예수는 연기하는 삶의 진정성을 뜻한다. 그에 대한 믿음이 곧 윤리고 사는 고통에 대한 해답이다. 덧붙여서, 이 소설이 ‘무덤’과 ‘이야기(소문, 전설)’로 끝난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무덤은 타인과의 관계의 종결을, 이야기는 그 생성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인생은 앞으로도 수많은 무덤과 이야기를 포함하며 진행될 것이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나는 지극히 얄팍한 인간관계관을 갖고 있고, 실제로도 관계의 버거움이 귀찮아서 많은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상사는 어째서 귀찮은 지인을 ‘손절’하지 않았을까? 이에 관한 대답은 읽는 도중에 이미 나왔다. 작품의 결론은 더 멀리에 있다.
이 작품에 관해 생각하면서 자신의 얄팍함을 넘어서는 새로운 기준을 이해할 것도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종교가 없고 기독교는 더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겪는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고통이 약간이라도 가벼워지는 건 분명 이 작품을 읽은 덕이다.
철저히 내 시각에 의한 읽기이며 거칠고 잘못된 독해로 작가님과 다른 독자분들의 기분을 해치지 않기만을 바란다. 훌륭한 작품을 공개하신 박부용 작가님께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아주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