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는 두 번째 SF 소설이군요. 원룸 사이즈 종말론은 작은 무대와 적은 인물수로 가볍게 엮인 코지코지한 SF 소설입니다. 거창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딱 원룸 같이 작고 아담합니다. 종말의 세계인데도 유순하구요. 인간형 구출 로봇 Re-167031, 애칭 레이는 생존자 구출을 위해 대부분의 인류가 증발한 도시 위를 헤매고 있습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는 20층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그곳에서 생존 신호가 닿았기 때문입니다. 생존이라고 하니 폐쇄되고 무너진 건물 잔해를 마구 뒤지며 인간의 숨을 쫓을 것 같지만 예상 외로 이 로봇 엘리베이터를 타구요. (아직 전기가 통하니까!)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며 생존자가 놀랄까봐 인사까지 합니다. “혹시 안에 계신가요????” 정말 위기감이 없지 않습니까?? 근데도 왤케 이 로봇 귀여울까요??
생존자의 이름은 문수진.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볼 때 고등학생으로 추측되는 수진이는 하룻밤만 이곳에서 더 지내게 해달라고 레이에게 부탁합니다. 레이는 미소로 화답하며 하룻밤 쉬어가기로 하는데요. 눈을 떠보니 뭔가가 이상합니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그런 거. 대체 뭔일인가 싶었더니 아뿔싸!! 팔다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레이가 로봇이라지만 전원을 내려놓은 동안 팔다리를 다 분해해 버리다니욧!! 레이는 당황스럽지만 수진이는 로봇인데 뭔 상관이냐는 듯 라면 끓이기에만 집중합니다. 매콤한 냄새가 가득한 원룸 안, 인류 멸망 직전의 라면 냄새라니 이거 넘 위험한 거 아니냐며!! 레이는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나 수진이 원망스러워요. 거기다 레이는 라면을 먹지도 못하니까요. (독자는 먹을 수 있는 라면, 저도 라면 먹고 싶습니다!)
생존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하는 레이, 절대 싫다며 계속해 거부하는 수진이. 이 둘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물도 라면도 이 건물 안에선 한정적일 수 밖에 없는데 설마 수진이는 원룸에서 계속 버틸 생각인 건 아니겠지요? 수진이의 짐작할 수 없는 의도와 마음을 궁리하며 소설의 끝까지 읽어 나간 후엔 왠지 핑 눈물이 돌았습니다. 소박한건지 잔인한건지 알 수 없는 수진이의 꿈을 팔다리 없이 포옹하는 레이가 가여워서요. 레이의 진정한 종말은 여기 원룸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