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은 죽고 싶습니다. 살인자의 딸로 태어나 모친에게 배신 당했고 이제는 죽는 것 이외에 아무 바람도 없는 상황입니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린 날 어찌된 일인지 지현은 죽지 않습니다. 대신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사무실에서 깨어납니다. “여기서 자고 있으면 입 돌아갑니다, 아가씨.” 여긴 어디? 넌 누구? 말로만 듣던 저승길에 들어선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죠. 병원도 아니고 의사 앞도 아닌 어쩐지 현실감이 없는 곳에 어리둥절한 지현의 눈에 그 남자가 보입니다. 말끔하게 차려입고서 산처럼 쌓아놓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당신은, 설마, 혹시, 저승사자?!! 그런데 이 남자 엉터리 같은 말로 지현을 물 먹입니다. 당신은 죽을 수 없다, 당신이 갈 천국도 지옥도 없다, 죽고 싶어 안달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당신은 원하는 결말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저승에서 밀쳐진 듯 점점 방이 멀어지더니 지현은 곧 병원에서 깨어납니다. 지현은 자신이 정신착란에 빠졌다고 생각하지요.
옥상에서 떨어졌는데, 살았습니다. 가스를 피웠으나, 또 살았습니다. 목을 맸지만, 역시 살았구요. 예감에 63 빌딩에서 떨어진대도 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만나게 되는 의문의 남자, 그는 거듭 말합니다. 당신은 죽지 못해, 당신 때문에 내 일만 늘어나고 있어, 제발 그만 좀 해줘. 지현은 꾀를 씁니다. 자살시도를 하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일이 늘고 있다고? 만약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자살을 도와서 당신의 야근을 늘려주겠어! 그때부터 매일매일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기를 당해서, 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져서, 암에 걸려서, 왕따 때문에. 세상에 죽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죽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지현은 그들과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올라오는 죄책감을 꾹 누르고서 그들의 자살을 돕죠. 누군가의 방해공작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매번 실패하지만 지현은 멈추지 않습니다.
한번은 성공할 뻔도 한답니다. 고2의 어린 학생이었는데 대학에 가면 삶이 좀 달라지냐고 묻는 학생에게 지현은 대답합니다. 대학이라고 별 뾰족한 수는 없으며 우리 같은 인생에 남은 것은 비극뿐이라구요. 학생은 자살을 결심하고 두 사람은 꼬옥 끌어안은 채로 처음 그날처럼 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요. 이번에야말로 라고 생각하는 지현. 지현의 자살은 성공했을까요? 지현은 절망뿐인 세계를 벗어나 육신을 벗고 훨훨 날아올랐을까요? 지현과 함께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 그 학생은 왜 알지도 못하는 언니와 이러고 있는건지 혹시 후회하진 않았을까요? 자살자들 때문에 매일 밤 야근 중인 의문의 남자는 언제쯤 업무를 경감받고 꿑 같은 휴가를 보내게 될까요?
201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고 17년엔 젊은작가 상도 수상했던 천희란 작가님이 얼마전 <자동 피아노>라는 책으로 십여년을 넘게 자살사고(죽고싶다는 생각)으로 고통받아 왔다고 고백을 하셨어요. <영의 기원>에서 유서를 쓰듯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을 하실 적에 작가적 감수성이려니 대수롭지 않게 읽어 넘겼기에 작가 후기 속 고백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토록 젊고 이토록 화려하게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작가님께서 자살에 대한 긴 긴 충동으로 정신과치료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왜 제 일도 아닌데 그리 암담하던지요. 이 단편을 읽은 것도 자동 피아노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는데요. 천희란 작가님이 책을 통해 들려주셨던 한 마디를 지현과 그녀를 찾아왔던 자살희망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당신이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봄 문득 더는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천희란 작가님처럼 죽음을 소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문득 봄, 같은 하루가 찾아가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