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작품의 결말까지 모두 다룹니다.-
대장장이와 선비의 긴장감 있는 서사
이 작품은 <은장도>라는 제목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이끌려 보게 되었다. 브릿G에서 가상의 역사/시대극 장르는 많이 보았으나 실제 우리네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흔치 않아서 흥미롭게 읽었다.
첫 장면의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모습의 묘사는 묵직하면서도 담백하고, 유연한 문체 덕분에 잘 읽히면서도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져 좋았다. 아픈 어머니 때문에 찜찜한 일감을 맡긴 정씨를 생각하며 대장장이가 근심하는 동안, 밤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딸아이를 괴한들에게 잃은 선비였다.
선비가 먼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장장이가 그 뒤를 이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이 장면에서 억울한 것은 선비뿐만이 아니고 대장장이도 나름의 한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나 대장장이의 이야기를 듣고도 선비는 복수의 칼을 놓지 않는다. 그는 대장간을 등지고 죽은 딸에게 선물할 은장도와 환도를 들고 나선다.
그 슬픔은 헤아릴 수가 없으나
감히 그 슬픔을 어찌 헤아릴까.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는 현감 때문에 선비는 직접 복수하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환도를 만들어달라 했던 것이다. 대장장이는 선비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깝게 여긴다. 이는 당연지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정도의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선비의 딸을 죽인 괴한들이었다. 대장장이는 그 괴한들의 무기가 자신이 만든 것임을 직감한다. 그는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복수의 칼날에 대비해 무기를 집어든다. 슬픔도 그가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칼끝은 누구를 겨눠야 하는지
작품을 전부 읽어내리며 후반부가 다소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장장이와 선비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기에는 필연성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부분에서 무기를 준비하는 대장장이의 모습에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복수를 하지 않았던 그가, 이제 와서 다른 이의 복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그 과정에서 그는 다른 이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저 생존하기 위해 무기를 든 그의 모습이 다소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군관이었던 대장장이는 살아남기 위해 애썼고 불법적인 일까지도 받아들였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결과로 이어졌다면 그 굴레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야 옳은 것이 아닐까 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되는 긴장감과 반전에 힘을 쏟는 것보다, 왜 복수의 굴레가 끊이지 않는가에 대한 깊은 논의, 인물들의 고뇌를 발전시켰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왜냐하면 따져보면 이 과정에서 정씨도 잘못을 한 것이고, 대장장이를 죽이려 든 장군도 잘못한 것이었다. 선비의 딸을 죽인 괴한들도 마찬가지였다. 왜구의 침략이라는 환경적 요인도 한 몫을 했으며, 부패한 관리의 무관심도 그러했다. 이들의 죄를 서로 비교해봤다면, 환경에 의해 좌절하고 복수심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냈다면, 좀더 입체감 있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 같다.
이에 덧붙여 다른 분의 리뷰를 앞서 읽었을 때 더 긴 작품으로 다시 쓰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나 또한 동의한다. 이 작품의 서사는 갈등과 복수의 과정이 아주 매력적이기에 약간 방향을 수정하여 긴 호흡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느낌으로 밀고나가는 힘이 있었다면, 박진감 있는 하이라이트 장면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 조금 더 깊이 있는 관점에서, 긴 호흡으로 이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았다. 두 인물이 중심이 되는 것도 좋다. 중편이라는 분량에서는 그 정도만 소화해도 충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패한 나라, 왜구의 침략 등 시대적인 배경이 단순히 양념이나 소설적 장치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서사와 중심 인물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더 확장된 이야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그렇게 배경과 인물이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면, 독자에게 더 깊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은장도의 역할은 대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두 남자의 드라마가 은장도를 매개로 만나는 구성까지는 좋으나,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은장도가 크게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작품의 분위기를 비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넣은 장치가 은장도라면 다음과 같이 은장도가 등장했어도 좋을 것 같다. 선비의 딸이 결혼이나 출산을 앞둔 인물로 나와 참혹하게 죽어가면서 남긴 유품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선비의 복수심은 더욱 불타올랐을 것이며, 독자가 보기에도 훨씬 가슴이 아픈 장면이 탄생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품 속의 요소는 그만의 목적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든지,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작품은 제목도 은장도로 했기 때문에 은장도가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나오는 장치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작품의 전체적인 테마도 비극이 복수로 이어지는 굴레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은장도라는 소재를 살린다면 더 좋은 방법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작품
다소 아쉬운 점에 초점을 둔 것 같아 마무리 삼아 좋은 점을 꼽아보려 한다. 첫째는 담백하고 깔끔한 문체이다. 시대극이 사실 그 맛을 살려내기 쉽지 않은 장르이다.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대를 그려내려니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고민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작가가 작품 속 장면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여러 단어와 문장, 표현을 고르고 골랐을 것이며, 연구도 많이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점에서 작가에게 정말 훌륭한 자질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두 번째는 두 주인공의 서사가 만나는 지점을 잘 그려냈다는 것이다. 대장장이와 선비. 언뜻 보기에 전혀 연관성이 없을 듯한 두 인물의 이야기를 시대적 배경과 절묘하게 얽어 읽는 이로 하여금 충분한 긴장감을 주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러한 방식을 차용하여 인물들을 그려내는 글은 참 많지만, 그럴듯하게 인물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작가가 이야기꾼으로서의 기본기가 있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참 매력적이며 시간을 들이고 노력도 많이 기울인 작품이라 느껴져 좋았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써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