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이라는 족쇄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영웅서사 #트라우마서바이벌 #현대로판 #암튼해피엔딩 #이능력 #어반판타지 #ISTJ #ENFP #ISFJ #헌신여주
  • 평점×1575 | 분량: 83회, 2,375매 | 성향:
  • 소개: 불멸재생능력을 숨기고 살던 릭은 어느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시설에 잡혀와 실험이라는 이름하에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방에 ... 더보기

휴브리스(Hubris)로서의 퀸시-신이 되려 한 인간의 비극

5일 전

[반(反)영웅이 아닌 또 다른 비극]
퀸시를 악당으로 읽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독해다.
그리스 비극에서 ‘휴브리스(Hubris)’는 단순히 ‘오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충동이다. 신의 영역에 침범하려는 것, 운명을 통제하려는 것,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 가능한 체계로 환원하려는 것.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반복되는 이 충동은 항상 파국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파국이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비극인 이유는, 휴브리스를 행한 자가 자신의 관점에서는 전혀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퀸시가 바로 그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1. 퀸시의 세계관: 모든 것은 데이터다
퀸시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그의 언어다.

“재생 속도, 예상치의 두 배.” “오차가 없어.” “처음부터였어.” “모든 게 예상대로야.”

퀸시의 모든 발화는 보고서 언어다. 현상을 기술하고, 수치로 환원하고, 파일로 정리한다. 그에게 세계는 측정 가능한 변수들의 집합이다. 릭의 재생 능력도, 엘린의 시야 조작도, 두 사람의 연결도 전부 파악 가능하고 이용 가능한 데이터다.
이 세계관은 내부적으로 완전히 일관된다. 그리고 바로 이 일관성이 그를 비극적으로 만든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을 인간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그의 동기는 선의였다. 그의 논리는 완벽했다. 그러나 그것이 신의 질서를 침범했기에 파국이 왔다.

퀸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능력자들을 측정하고 분류하고 이용한다. 그의 동기는 — 소설에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 아마 무언가 더 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군사력, 국가 안보, 과학적 지식. 어느 것이든, 그의 논리 안에서 그것은 완벽하게 정당하다.
그래서 퀸시의 휴브리스는 악의가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악당이다.

 

2. 설계자의 오만: 인간을 변수로 취급하는 것
퀸시의 휴브리스의 핵심은 인간을 변수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처음부터였어. 너희 둘을 같은 구역에 배치한 것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소리가 들리도록.”

이 발언의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여야 한다. 퀸시는 릭과 엘린이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을 설계했다. 벽의 두께, 음향 투과율, 배치 시간까지. 두 사람이 처음 연결되던 그 순간은 퀸시의 계획표 안에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에서 ‘희생 제의(Sacrifice)’의 구조와 겹친다. 아가멤논은 순풍을 얻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쳤다. 그의 논리 안에서 그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군대를 이동시키고 전쟁을 이기기 위한 비용. 비정하고 냉혹해보일지 몰라도 이피게네이아는 그 ‘비용’이었다. 퀸시에게 릭과 엘린은 이피게네이아다. 더 큰 목적을 위한 변수이고, 관리해야 할 자원이며, 최적화해야 할 데이터다.
그리고 아가멤논이 그 결정으로 인해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죽임을 당했듯, 퀸시는 자신의 설계에 의해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조금 다른 점은, 퀸시를 죽이는 것이 퀸시 자신이 설계했던 연결 자체라는 점이다. 엘린이 릭을 위해 시설로 돌아왔고, 릭이 엘린을 위해 시설로 들어왔고, 그 연결의 힘이 퀸시를 쓰러뜨렸다. 설계가 설계자를 삼킨 것이다.

 

3. 두 번의 오차: 휴브리스의 균열
고전 비극에서 휴브리스의 붕괴는 항상 하나의 균열에서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몰랐다. 아가멤논은 귀환 후의 세계가 자신이 떠난 세계와 같지 않다는 것을 몰랐다.
퀸시의 균열은 소설 안에서 두 번 명시된다.

1) 첫 번째 균열: 릭의 새 능력
74화에서 퀸시가 말한다. “오늘 새로운 것이 생겼지. 생명력 흡수. 데이터에 없던 거야.” 그리고 거의 즉시, 처음으로 말을 멈춘다. “아니면……내가 데이터를 잘못 이해했거나.”

이 망설임은 퀸시 캐릭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소설 내내 퀸시의 언어는 단정적이었다. 확인이었고 기술이었다.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문장이 없었다. 그런데 “잘못 이해했거나”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퀸시의 세계관 내에서 가장 위험한 가능성이다. 측정한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데이터가 현실을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
비교신화학적으로 이것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준 것을 제우스가 몰랐던 것과 같다. 퀸시의 측정 체계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을 보는 자의 맹점. 가장 큰 오만은 자신에게 맹점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2) 두 번째 균열: 펜을 내려놓지 못하는 손
73화의 퀸시 사무실 장면. 파일을 꺼냈다. 새 항목이 비어있다. 적으려 했다. 멈췄다. 모니터를 본다. 손이 잡혀있는 두 사람을 본다. 펜을 내려놓지 않는다.
이 장면이 첫 번째 균열보다 더 근본적이다. 첫 번째 균열은 데이터의 오류다. 수정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균열은 분류 불가능성이다. 퀸시의 체계 안에 이것을 담을 항목이 없다. 피가 묻은 손이 깨끗한 손을 잡고 있는 것. “느슨하지 않았다. 놓을 생각이 없는 손이었다.” 이것은 무슨 항목인가. 재생 속도? 능력 퍼센트? 억제 조건? 어느 것도 아니다. 퀸시의 파일 체계 안에 이 데이터를 기록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펜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퀸시의 휴브리스가 도달하는 진짜 한계다. 모든 것을 측정하고 파일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측정되지 않는 것 앞에서 멈춘다. 신이 되려 한 자가 신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4. 감정 없음의 아이러니: 가장 인간적인 마지막
소설 내내 퀸시는 감정이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보고서를 읽는 목소리.” “오늘 날씨를 말하는 것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자는 자신도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다. 퀸시는 기록하고 측정하고 분류하는 기능으로 자신을 축소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쓰러지면서. “흥미롭더군.”
그리고 “죽은 자의 얼굴에 아주 작게 있는 미소.”

이 두 가지가 소설에서 퀸시가 유일하게 보여주는 감정이다. 흥미로움. 그리고 미소. 보고서 언어가 아닌 것. 데이터가 아닌 것. 인간의 것.

그리스 비극의 구조에서 이것은 인식(Anagnorisis)-무지에서 지식으로의 전환이다. 비극적 주인공이 자신의 진짜 상황을 깨닫는 순간.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순간처럼, 퀸시는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를 인식한다. 릭에게서 “데이터에 없던 것”을 봤다는 것. 예측 체계 밖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흥미롭다는 것 — 무섭거나 위험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과학자 입장에서 흥미로운 것으로서.

이 마지막 감정이 퀸시를 악당이 아니라 비극적 인물로 만든다. 감정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자가, 마지막에 감정을 가지고 죽는다. 인간의 것을 제거하고 기능으로만 존재하려 했던 자가, 마지막에 가장 인간적인 반응 —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외심 — 을 보인다.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살아온 사람이 마지막에 인간의 것처럼 웃었다.” 이것이 릭이 퀸시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허탈함. 그리고 그 허탈함이 퀸시의 비극을 완성한다.

 

5. 퀸시의 진짜 오류: 설계할 수 없는 것
퀸시의 휴브리스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가 무엇을 잘못 계산했는지를 봐야 한다.

퀸시는 두 사람의 연결을 설계했다. 그리고 그 연결을 이용해 두 사람을 통제하려 했다. 이 계획의 논리는 완벽하다. 인간은 연결된 것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연결을 만들면 통제 레버가 생긴다.
그런데 퀸시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설계된 연결이 설계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계획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계획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

75화에서 릭은 손을 놓지 않으면서 생각한다. “퀸시가 설계한 것이 있었다. 그 설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설계 때문에 있는 것인지. 설계가 없었어도 있었을 것인지.”
이 물음이 퀸시의 한계를 정확하게 짚는다. 퀸시는 연결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연결이 어떤 질(質)을 가지게 될지를 통제할 수 없었다. 벽의 두께는 설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벽 너머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누군가에게 무섭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은 설계할 수 없었다.

이것이 휴브리스의 고전적 오류다. 오이디푸스의 부모가 아들의 출생을 막으려 했을 때,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예언을 실현하는 경로가 된 것처럼, 퀸시가 두 사람을 연결시킨 것이, 자신을 파국으로 이끄는 경로가 됐다. 설계자가 설계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휴브리스가 항상 파국으로 끝나는 이유다.

 

6. 기록자의 아이러니: 마지막 데이터는 기록되지 않는다
퀸시의 직업적 정체성은 기록자다. 모든 것을 측정하고 파일로 남기는 자. 그런데 소설은 두 번에 걸쳐 이 기록자가 기록하지 못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73화의 사무실 장면이다. 펜을 들었으나 적지 못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은 파일의 어느 항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두 번째는 죽음 자체다. 퀸시의 마지막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 표정을 읽을 사람이 없었다. 기록할 사람이 없었다. 평생 기록만 했던 자의 가장 인간적인 순간은 기록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에서 역전(Peripeteia)-운명의 급변이다. 주인공이 의도한 것이 반대로 실현되는 것. 기록자의 마지막은 기록되지 않는다. 측정자의 마지막은 측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파일로 만들려 했던 자의 마지막은 정작 파일에 없다.

비교신화학적으로 이것은 휴브리스의 완성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에서 아가멤논은 승자로 귀환하는 순간 죽는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추락하는 것. 퀸시는 “오차가 없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오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가장 확신하는 순간이 가장 틀린 순간이다.

 

[퀸시가 보여주는 것]
퀸시는 이 소설에서 하나의 테제를 구현하는 캐릭터다.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는 자, 인간을 변수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 자,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 가능한 체계 안에 넣을 수 있다고 믿는 자가, 그 믿음 자체가 측정할 수 없는 것에 의해 무너진다.
퀸시의 파일에는 그것을 담을 항목이 없다. 그것이 퀸시의 비극이고, 동시에 릭과 엘린의 승리다. 측정되지 않는 것이 측정하는 자를 이겼다. 데이터에 없는 것이 데이터를 이겼다. 그리고 그 이김의 방식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잡은 손이었다.
가장 작고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정교한 설계를 무너뜨렸다. 그것이 퀸시라는 캐릭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수천 년 동안 그리스 비극이 반복해서 말해온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라는. 그 시도가 얼마나 정교하든, 얼마나 완벽하게 보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