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믿었다

  • 장르: 추리/스릴러, 로맨스 | 태그: #사건8로맨스2 #판타지 #정치스릴러 #미스터리 #80화까지로맨스없음 #쿨시크녀 #능글남 #유쾌한데진지함 #군상극
  • 평점×494 | 분량: 32회, 744매
  • 소개: 세자 전하의 연례 행차 일주일을 앞둔 어느 날, 평화로운 항구 도시 셀루스에서 이마에 숫자가 새겨진 채 사망한 견습 궁정 마법사가 발견된다. 100년 전, 서기 1508년. 광기... 더보기
작가

아무강아지 님의 리뷰에 드리는 글 – 판타지의 문법으로, 미스터리한 비밀을 풀어가다

9월 20일

아무강아지 님께서 작성해주신 리뷰

를 읽고, 저의 지향점을 재확인했습니다.

리뷰어께서는 판타지와 미스터리, 두 장르 모두에 내공이 상당하신 분으로, 제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 장르의 융합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셨습니다. 이에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래의 글은, 아무강아지 님의 리뷰에 대한 저의 견해입니다.

 

 

판타지와 미스터리/스릴러, 두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꿰고 있는 독자는 많지 않습니다. 창작자는 더더욱 드물 것입니다. 한쪽은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세계를 그려내며, 또 한 쪽은 이성과 논리를 전제로 해야만 진행이 가능한 분야이기에 그렇습니다. 서로 양극단에 놓인 것이지요.

극과 극은 통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양극단에 놓인 두 장르를 이어보고자 하는 열망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중세 서유럽 시대를 모방하여 빚어낸 시뮬라르크로서의 정통 판타지 세계, ‘소드 앤 소서리 Sword & Sorcery’ 월드를 그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 정통 판타지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리지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능력을 전제로 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특수한 능력으로 범행을 저지르거나, 반대로 그 능력으로 범행을 밝혀내는 작품들이요. 전자로는 윤현승의 <라크리모사>, 쿠가 본초의 <이웃은 한밤중에 피아노를 친다>, 후자로는 <귀족 탐정 다아시 경> 시리즈가 떠오르네요.

본격 추리를 넘어서서 미스터리/스릴러의 범위를 좀 더 유하게 잡는다면, <해리 포터 시리즈>나 <퇴마록>도 해당될 것입니다. 두 작품 모두 판타지적인 배경에, 이야기의 진행 방식으로는 미스터리의 문법을 일부 차용했으니까요.

제가 감히, 그 계보의 뒤를 잇는다고 말해도 될까요? 솔직히 말하면, 딱히 판타지와 미스터리를 결합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쓰진 않았습니다. 그저 쓰고 싶은 소설을 썼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이런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이왕 완성한 것, 도전장을 내밀어보겠습니다. 사실 장르가 무슨 상관일까요. 소설이 재미만 있으면 되죠.

 

마법은 판타지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에는 마법이 실재하지는 않지만, 그 비슷한 행위는 여러가지로 불리웠습니다. 요술, 주술, 마술, 저주…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을 현혹시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특징 때문에, 종교의 이름으로 처단받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인류가 생겨난 이래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지금까지도, 그 행위의 인과성은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판타지라는 장르는, 이 비현실적인 행위가 실재한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마법만 나오면 다행입니다. 본격(?) 판타지 중에는 요정, 난쟁이, 용, 각종 신, 천사와 악마, 괴물이나 마족 등이 나오기까지 하지요. 이는 하이 판타지 High Fantasy로도 불립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이성과 논리로 풀어내라. 인간의 상식선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이것이 추리물의 전제입니다.

추리소설의 세부 카테고리 중, 본격 추리로 분류되는 장르가 있습니다. 밀실 살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역할의 (진)주인공이 난제를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풀어내는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이에 해당합니다.

미스터리는 추리소설이 요구하는 정도로 고도의 논리적인 증명은 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주인공이 직면한 위험한 상황이나 난제, 혹은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스릴러는 이보다 좀 더 유합니다.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갈 때 짜릿한 쾌감을 느끼도록 하지요. 지향점이 스릴 그 자체에 맞춰져 있습니다.

잠시 여담인데, <나는 너를 믿었다>의 세부 장르를 정치스릴러와 미스터리로 분류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추리물보다는 미스터리나 스릴러적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했거든요.

 

마법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판타지 작품 속 세계관 주민들은 그 비현실성을 ‘실재’로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비현실성이 그들에게는 상식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일상성을 현실로서 인정하는 세계에서조차 기이한 일은 일어납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의 상식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판타지 배경 하에 그려진 미스터리 소설들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그 세계의 주민조차 이상하다고 여길 현상을.

그렇기에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는 근거 역시 현실 세상에서 드는 근거와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현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행위나 현상이라도, 소설 속 세상에서는 당연하게 취급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해결자는 그러한, 세계의 주민들만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근거로 들며 기이한 현상을 설명합니다.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근거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것을 근거로서 인정합니다. 왜냐고요? 독자들은 이미 그 세상을 비현실성의 세계-판타지로서 인정했으니까요.

소설 속 세상에서 말이 된다면, 소설 속 세계관의 설정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현상이라면, 독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작가와 독자 간 공유되는 암묵적인 규칙이요, 그 누구도 깰 수 없는 불문율입니다.

그래서 제가 판타지를 사랑합니다. 판타지 세상은 자유롭거든요.

 

장르는 끊임없이 합쳐지고, 또 갈라집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존재가 움직이듯, 장르 역시 ‘살아 있기에’ 움직입니다. 움직여야 발전합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요, 정체는 곧 폐사를 의미하니까요.

판타지와 미스터리, 제가 좋아하는 두 장르가 끊임없이 움직이기를, 그래서 생명력을 이어나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긴 리뷰를 통해 저에게 지향점을 재확인시켜주신 아무강아지 님께,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