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른, 신묘굴
제목 뒤에 붙은 ‘조선 판타지 로맨스’라는 설명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그간의 퓨전 사극 드라마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왕이 나오면 왕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고, 선비가 나오면 선비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고, 도깨비가 나오면 도깨비가, 사관이 나오면 사관이 연애하는 이야기라고 아주 성급하고 단순하게 일반화를 해버려도 큰 문제 없이 얼추 맞아떨어지던 그 많고 많은 드라마 말이다. 그럼 <신묘굴>은 신묘굴이라는 장소에서 연애하는 이야기인가? 초반의 흐름은 그런 내 나름의 합리적 추론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열아홉과 서른다섯의 나이 차가 의아하기는 했으나 차례로 드러나는 주요인물과 주변 인물들의 성격이나 배경 등은 예상하던 바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이나 전개의 독특함보다는 허윤이에게 달라붙은 ‘열아홉의 나이로 혼기는 한참 전에 놓쳤고, 애교와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으며, 입이 험해 시어머니가 화병에 걸릴 것이 뻔하니 좋은 혼처를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래도 뜯어보면 고운 선이 보이는, 미천하지만 그 마을 여각에서 제일가던 기생의 딸년’이라는 수식이 변할 것인가 변하지 않을 것인가, 변할 것이라면 어떤 방향으로 변할 것이며 설정된 시대 안에서 어떤 최선을 찾아낼 것인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기생이끼를 팔뚝에 붙인 채 ‘풀린 눈으로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입술을 핥으며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는 간 떨리는 자태’로 변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신재는 허리에 감긴 윤이를 질질 끌고 의학원으로 갔다. 의학원에 도착한 그는 곧장 사신각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윤이를 끌어다 내팽개쳤다. 바닥에 쓰러진 윤이는 ‘아…!’하고 앙칼진 신음을 흘렸다. 쫓아 들어오려는 하랑을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세차게 닫았다. 우르르 몰려온 의생들을 향해 썩 꺼지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랑과 의생들은 멀찌감치 물러섰지만 기둥 뒤에 숨어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주변을 물린 신재는 신을 벗고 방문 앞에 섰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방에 있는 요물은 기생이끼다.. 허윤이가 아니다.. 허윤이가 아니야..’
그렇게 되새김질하며 그는 심호흡했다. 이내 이성을 되찾고 결의에 찬 얼굴로 문고리를 잡았다. 방문을 열었다.
“스승니이임… 으흐흐흥…”
방수 총각이 기생이끼 처방을 받은 이후로 줄곧 묘한 웃음소리를 내었다는 점, 마을로 내려갔을 때 먼저 발견한 아이가 아니라 나중에 발견한 주막의 아낙을 사로잡은 점 등에서 이미 기생이끼의 효과에 대한 암시가 이어져 왔었다고 생각한다. 즉, 기생이끼가 인간의 성욕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음에 대해서는 이미 몇 가지 사건으로 밝혀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윤이는 기생이끼를 제 몸에 직접 붙여보았고, 그 이후 진행된 바를 설명하면서 위와 같은 전개가 무리한 것은 아니나, 몇 가지 표현에 있어서 아쉬움은 남는다. 풀린 눈, 붉은 뺨, 앙칼진 신음, 간 떨리는 자태, 교태, 가느다랗고 축축한 손, 장녹수 뺨치는 요부와 같은 것들 말이다.
게다가 방수 총각의 머리에 남은 이끼를 떼어내기 위해 그가 평소에 짝사랑하던 깍쟁이라는 여인을 납치해 데려와 방 안에 가두어 방수 총각을 맞이하게 한다. 두 사람이 혼인하게 되었음을 다음 화에서 언급하기는 하지만, 다친 이가 없으니 모두 다행이라고 말하지만, 기생이끼의 부작용을 설명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불편하고 부적합한 표현과 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또한, 아쉽게도, 이 불편함은 새로움이 아니라 불쾌함으로 이어진다. 조선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렇게 적극적인 여인이 그려졌음에 반가워해야 하나. 남성의 안타까운 사연에 자신이 보쌈을 당했으며 강제로 한 방에 가두어졌음을 이해하고 혼인까지 허락한 여인이 등장했음에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방 안에서 옷을 기우고 있던 깍쟁이는 영문도 모른 채 주막에 쳐들어온 의생들에 의해 보쌈을 당했다. 여의생들은 의학원의 공실이었던 낡은 골방을 깨끗이 치우고 축신한 이불을 깔았다. 마치 자신의 신방을 꾸미듯 꽃을 꺾어 호리병에 꽂아 놓기까지 했다.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보쌈 당한 깍쟁이를 신방에 가둬 놓았다. 깍쟁이는 문을 두드리며 연유를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고 큭큭 웃기만 했다.
(중략)
그들은 방수를 신방에 밀어놓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중략)
방수와 깍쟁이가 신방에 갇힌 지 하루가 지났다.
방수의 머리에 붙은 이끼는 떨어졌다.
완결작이 아니기에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상하고 기대해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기생이끼편 이후 시작된 용나비꽃편의 메인이 되는 ‘용나비꽃’은 기생이끼와 달리 굉장히 위험한 독류로 소개되어 있으며, 그간 베일에 싸여있는 듯했던 진태의 수사가 드디어 외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윤이와 신재의 로맨스에는 큰 이상 전선 없이 흘러갈 것으로 보이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이 평범하지 않으니 이 로맨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다. 더하여 아쉬움으로 느껴졌던 부분들이 후에서 보완될 수도 있다는 기대도 있다. 이 이야기가, 이 인물들이 또 어떤 사건을 만나며 나아갈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