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벼라별이야기
이 동화 같은 이야기에는 ‘벼라’라는 이름의 별과 ‘오로지’라는 이름의 나뭇가지가 등장한다.
별이 있었습니다. 별의 이름은 벼라, 그래서 벼라별이라 불렸습니다. 벼라별은 늘 꿈을 꾸고 있습니다. 벼라별 꿈이 꾸는 꿈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벼라별은 벼라별 생각을 다 했고, 그래서 벼라별 나무, 벼라별 풀, 벼라별 꽃들이 피어났습니다. 벼라별은 행복했습니다.
벼라별은 아름다운 별이었다. 벼라별이 벼라별 생각을 다 하면서 피워냈던 아름다운 벼라별 나무와 풀, 꽃으로 가득한 보석 같은 별. 어느 날 벼라별에 꽂힌 오로지는 자신이 이 아름다운 벼라별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길 갈망한다. 벼라별의 벼라별 생각들을 오로지 하나에 담았고, 오로지가 아름다워질수록 벼라별은 오로지 생각만 했으며, 그에 오로지는 더 아름다워졌고, 색색의 잎과 보석 같은 꽃들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벼라별 생각을 나누어 받지 못한 다른 꽃과 잎들은 생기를 잃어가고야 만다.
나는 그림책을 즐겨 읽는다. 그림책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인식이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림책 중에는 어른들을 위해 출간된 그림책도 많다. 또한, 어린이용으로 출간이 되었어도 어른들이 읽었을 때 생각하고 이야기할 거리가 더 많은 그림책도 있다. 내가 <벼라별 이야기>에 기대한 것은 후자였다. ‘별이 있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읽는 순간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그림으로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가 동화의 옷을 입고 다양한 생각의 거리를 던질 것으로 기대했다는 말이다.
아쉽게도, 내 사유의 지점이 얕고 길이가 짧은 탓인지 <벼라별 이야기>가 벼라별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로지를 사랑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떤 사랑이나 갈망, 때로 집착과 같은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야기의 끝에 공허함이 남는 것은 벼라별과 오로지 모두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어린이 동화, 어른 동화, 어린이 동화로 나왔으나 어른들에게 어울리는 동화 그 중의 무엇이든 간에 사유를 위해서는 애정이 전제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다만, 12매 길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왜 사랑하지 못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 분량의 절반인 6매가 넘어갈 때까지 쓸 수 있다는 것이 엽편의 장점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없으며, 어쩌면 이 소설 역시도 우리의 ‘벼라별 생각’을 위해 한 발자국 빠져주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끝까지 읽은 후 여운의 길이까지 포함하더라도 인물을 사랑하기에는 턱없이 짧았던 감이 있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이 예쁜 색감과 촉감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젖어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