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동체로서의 연극
전 대학 연극 동아리에 꽤 오래 몸을 담았지만 한 차례도 배우로 무대에 선 적은 없습니다. 연극이라는 장르는 무대도 대본도 연출도 없어도 배우와 관객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연극 해보겠다는 대학생들은 다들 배우를 하고 싶어하는 편인데, 전 연기에 욕심도 로망도 없었어요. 전 그냥 사람들과 어떤 목표를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습니다. 동아리방에서 몇 시간씩 이어지는 회의, 지쳐 나가 떨어질때까지 발품 팔던 동묘와 광장시장, 배우가 아니어도 함께하며 의견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연습실의 그 시간들이 주는 감각은 쉬이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를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 만들어내는 감각, 그리고 공연장 예약 시간이 끝나면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그 세계를 함께 추억하고 일상 속에서 어떻게든 이어나가던 감각.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이 작품의 초반부를 읽으며 기대하게 되는 서사가 있었습니다. 소외계층이 공동체에 소속되는 과정. 모두가 외면하는 자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모습. 하지만 『1호선의 브레히트』는 그런 나이브한 기대보다는 훨씬 무서운 작품이었습니다.
2. SF, 2043년
“말이 되더라고요. 법이 있더라고요! 하, 2043년에 공산주의자냐는 질문을 받는데, 어이가 정말로 없어서.”
보통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는 그 미래과 우리의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에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2043년정도 되면 아주 먼 미래는 아니지만, 안드로이드나 AI, 자동주행 열차 정도는 등장할 법도 하네요. 하지만 『1호선의 브레히트』에 등장하는 것은 실업률과 빈곤, 지하철 잡상인과 단속요원, 극우단체와 국정원입니다. 현재와 다를 것이 없어서 더 무서운 미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2043년에도 사상검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무섭고, 그 이상으로 2043년의 지하철 풍경이 지금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도 무서웠습니다. 지하철 잡상인들과 광인들, 그리고 스마트폰에 얼굴을 집어넣은 채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 – 그 풍경은 정말로 10여년이 흘러도 해결될 수 없는 소외일까, 씁쓸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3. 그래도 궁금하네요.
희곡 작가로서의 브레히트를 그동안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연극을 계몽의 수단으로 생각한 사람인 것 같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마도 별로 정당하지 못한 사견 때문인데, 지하철에서 펼쳐질 그의 극을 상상해보니 그건 또 보고 싶네요. 브레히트는 자신이 주창한 서사극에서 ‘낯설게 하기’(소격효과)를 통해 관객이 극에 정서적으로 몰입하는 것을 불편하게 하고, 그들의 객관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를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억척어멈』에 역시 낯설게 하기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익숙한, 그래서 당연해져 버린, 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면모를 품은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이들이 브레히트의 극을 올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낯설어진 지하철의 공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