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의 불길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불의 강 (작가: 나란, 작품정보)
리뷰어: 주디, 19년 4월, 조회 30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이름이 낯설어서 그런 걸까.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아직 적응이 안되는 것처럼 천천히 낯선 이들이 그려진 세계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괜찮아 질 거는 믿음으로 계속해서 글을 읽었다. 시작부터 웅장했다. 마치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읽는 것처럼 산자의 권위보다 죽은자의 권위를 더 추앙하는 신전들이 눈 앞에 그려질듯 찬란하게 그려진다.

 

아쉬난이 마리시에게 말하셨다. 너는 내 뜻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으므로 앞으로 내 말에 복종하여 여종들을 뽑을 때 그들의 몸에 표시를 하라. 이 표는 ‘샤’이다. ‘샤’는 그들이 내게 속한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어떤 사내이든지 ‘샤’를 받은 여종과 혼인하고자 하거나, 잉태시키거나, 그 벗은 등을 본 자는 내가 만 대에 이르기까지 저주를 내릴 것이니······.

-‘비할 데 없는 광휘’ 제 1권, 대신관 마리시가 샤를 받다.

 

신을 온전하게 받드는 이가 있다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이를 위한 찬양에 시니컬한 이도 있기 마련이다. 엔 칼라바알이 바론 그런 이였다. 그는 누구보다 ‘아쉬난이라는 신’을 받드는 동시에 그녀의 신랑이 되어야 할 이지만 그런 돌덩어리를 왜 내가 품어야 하냐는 반항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불의 강> 속 아쉬난의 영향을 크고 깊었다. 신을 믿는 이들의 집념은 강하고, 그것이 대대손손 내려와 그들을 지탱했기에 그가 진짜 말을 했던 하지 않았던 그 말들은 영원했다.

 

칼람의 왕이면 매년 섣달그름이 되면 성스런 혼인의 축제에서 여신의 신랑이 되어야 한다는 규율이 있다. 세대가 훌쩍 넘어가면 믿음의 세기도 깊어지지만 약해지기도 한다. 젊은 왕인 엔 칼라바알은 여신의 신랑이 되어야 할 몸임에도 그가 현재 처한 상황에 불만을 표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혼인의 날 신관 이디일리는 화로의 종이 되어 왕이 오는 행렬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고, 축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그곳을 꼿꼿하게 지켜나간다.

 

그러다 마주친 엔 칼라바알과 이디일리는 왕의 거친 패기로 신관인 이디일리에게 다가선다. 아쉬난의 표식이 있는 이는 그 누구도 건들어선 안되지만, 그는 거침없이 신관에게 다가선다. 저주 따위는 없다는 듯.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이 나뉘듯 <불의 강>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엔 칼라바알의 일탈이 이디일리에게는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과 헤어져야 할 이유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아쉬난의 신관으로서 신을 모실 수 없게 되었다.

 

이디일리에게 벌어진 고난의 시간들은 남자가 여자에게 강제로 행했던 일들이 고스란히 재현된다. 그렇게 잉태된 씨앗을 품고서. 시간과 공간은 달랐지만 이디일리에게 벌어진 이야기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이야기의 배경은 낯설음에서 이내 고유의 시간 속에서 세워진 다른 나라 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신비하기도 하고 아직 나란 작가님이 풀어내지 않는 이야기의 실타래 속에서 과연 패기 넘치던 왕의 저주의 불길은 어디까지일까 궁금했다.

 

아직 연재 중이어서 그 끝을 알 수는 없지만 첫 장면이 낯설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들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차내는 듯한 칼람의 왕 칼라바알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궁금하다. 이야기는 계속 이디일리의 유랑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서로의 단면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기에 앞으로의 이야기를 더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부디 이디일리가 아닌 왕이 조금 더 고난을 맛 봤으면. 시대의 상황에 말미암아 신 아래에 왕이 있고, 그 아래에는 피지배계층인 이디일리가 있다. 그녀의 태생이 노예계급이기에 어디서 있던 그는 수동적인 인물 밖에 될 수 가 없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가장 많이 움직이는 인물이 이디일리다. 아직까지는 그의 손아귀에 놓여있지 않은 인물이기에 그녀의 반전을 기대해 본다.

 

2부 3화까지는 읽는데 연재를 읽는 데 있어 수월하게 읽었는데 4화부터는 문단이 나뉘어 있지 않아 불편한 점만 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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