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그 또한 누군가의 아들 (작가: 장아미, 작품정보)
리뷰어: 유이남, 19년 4월, 조회 139

1.

정원에서 풀벌레가 울었다. 보풀이 인 카디건을 개켜 침대머리에 걸쳐둔 노은이 외투 중 가장 아끼는 것, 여우 털이 둘러진 캐시미어 코트를 꺼내 입었다.

거실에는 고기와 와인, 빵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마른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 노은이 현관문을 밀어젖혔다.

자신의 죄를 고하러 갈 때였다.

 

체호프의 「로실드의 바이올린」은 “그곳은 시골보다 못한 소도시였다. 게다가 노인들만 살고 있는데도 너무 드문드문 죽어 나가는 통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라는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관습적인 진술을 비웃는 듯한 체호프의 처음 두 문장처럼, 「그 또한 누군가의 아들」의 마지막 다섯 문장은 독자의 기대를 멋지게 저버린다.

죄는, 그것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떠나, 숨김의 대상이다. 이를 고한다는 것은 감추었던 것을 솔직하게 내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은은 카디건을 코트로 갈아입고 립스틱을 바른 뒤 현관을 나선다. 그것이 가장 아끼는 코트였다는 점에서, 노은은 오히려 자신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으로 가장하고 있는 셈이다.

감춤과 내보임, 생명과 죽음, 창조와 파괴, 죄지음와 순결. 「그 또한 누군가의 아들」의 행간을 따라 내려가며 우리는 뜨개질처럼 얽히고설킨 이중성의 날실과 씨실을 발견한다. 마치 “비단 폭에 놓은 자수”처럼, 이 리뷰는 그러한 이중성이 드러나는 순간순간을 들여다 볼 작정이다. 별 의미 없는 땀들에 불과한 리뷰를 보며, 누군가는 소설의 참뜻을 발견할 수 있기를.

 

 

2.

소설에서 ‘남편’은 그리 중요하게 서술되지 않는다. ‘노은’이나 ‘요일’과 달리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이 인물은 무언가 설계하고 제작하는, 목수나 건축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마치 나자렛의 요셉을 연상케하는)으로 묘사된다. 그는 노은이 사십 년째 살고 있는 집을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이며 세속적인 유흥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온순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어떤 유흥에도 손을 대지 않고, 오히려 무질서한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창조적인 인물.

그러나 동시에 그는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두어 달에 한 번씩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대한 몸을 뒤흔들며 노은을 구타한다. 이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불륜으로 의심되는 불순한 죄를 꾸미고 있으리라는 의심증과 편집증이 뒤섞인 형태로 제시된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를 축출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그것이 내 아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이 정도가 남편에게 할애된 서술의 전부이므로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이중성이 낳은 파괴의 소용돌이는 소설 전체의 원체험처럼 기능하고 있으므로, 소설을 엮은 실들을 더듬어보기 위해서는 다른 인물들을 살펴 보아야 한다.

 

3.

소설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건 아들에 대한 진술이다. 요일은 육식을 혐오한다. 소설(노은의 시선)은 그 이유를 “도축의 숨겨진 과정을 연상하는 까닭”라고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 죄는 숨김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요일은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식탁, 삶을 지속하고 생명력을 얻기 위한 과정 이면에 숨겨진 죄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한다.

이처럼 요일은 창조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예술적인 흥미과 재능을 보였고, 국립대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며 금속공예에도 조예가 깊다. 요일의 창조성에 대해, 어머니인 노은은 아들이 예술가인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요일은 동시에 파괴적인 인물이다. 그는 마을의 연쇄실종사건의 범인이며 세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죽인 죄인이다.

이러한 요일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소재가 뵈프 부르기뇽이다. 그는 육식을 혐오하지만 와인에 재워진 고기는 먹을 수 있다. 예수에 피에 의해 죄사함 받은 육류에는 더 이상 죄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죄를 걸머진 불경한 덩어리가 아니며 오히려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난 순결한 음식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노은의 진술은 순결함과는 거리가 멀다. “와인에 재운 소고기라니 이 얼마나 선정적인 레서피란 말인가. 노은은 걸쭉한 붉은 소스에 빵을 적셔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릴 적 들여다보았던 성화의 한 장면을 되새김질하곤 했다.”, “요일이 입가에 묻은 소스를 혓바닥으로 핥았다. 노은이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요일이 입 안 가득 고기를 욱여 넣고 우적거리며 씹었다.”

 

4.

결국 소설이 가장 큰 비중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노은이다. 남편과 아들이 그랬듯 노은 역시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적 인물이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는 그녀는 청소와 정리정돈에 열심이다. 요리가 각 재료의 성질을 살리면서도 재료 사이의 조화를 중시하는 일임을 떠올려보면 요리에 능한 그녀의 모습은 “전 우주”를 돌보는 예술가에 가깝다.

그녀는 요일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녀는 어린 요일을 자신의 창조성과 생명력과 동치시킨다. 요일이 자신과 동일한 세계에서 평화로우면서도 고독하고 영적인 삶을 살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위해 노은은 요일과 남편을 분리하여 이해한다. 그녀의 진술 속에서, 요일은 남편과 그리 닮지 않은 것 같다. 남편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은 어린 요일에게서 보이지 않는다.

요일이 연쇄실종사건의 범인이라는 정황이 드러났을 때, 노은이 크게 당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녀에게 요일은 순결하고 창조적인 존재이므로. 죄와는 무관한 존재이므로. 그러나 피 묻은 학생증까지 발견된 마당에 더 이상 아들의 결백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 노은의 무의식은 아들 속에 내재된 아버지의 성향을 꿈의 형태로 폭로한다. 아들은 더 이상 죄 없는 어린 양이 아니다. 이제 그는 어미의 산로를 파괴하며 등장한 사탄의 아들이다.

 

5.

그러나 그것이 과연 아버지의 것일까. 노은이 “굴복시키는 행위”에 매료를 느낀 게 과연 노은과는 무관한 일일까.

노은은 집이라는 우주를 다스리는 인물이다. 다스림은 세계를 지정하는 일이고 그것은 세계 외부를 상정한다. 이는 사물의 원래 모습을 찾아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를 방해하는 것을 치우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노은은 화조의 푸르고 싱그러운 모습을 찾아주기도 하지만 시안화칼륨으로 고양이를 죽이고 송충이를 짓밟아 죽이기도 한다.

요일을 낳은 것이 자신이라는 노은의 진술은 이제 다르게 다가온다. 노은은 결백하고 창조적인 요일을 낳았지만,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요일을 낳았기도 하다. 노은의 꿈이 폭로하는 것은 요일의 폭력성 뿐만이 아니다. 꿈은 노은의 살인을 상기시키면서, 남편과 요일과 노은을 죄의 굴레에 몰아넣는다. 요일의 목조름이 곧 노은의 것이면서 남편의 자리가 곧 노은의 것이다.

이는 요일이 노은의 살인에 동참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간 죄 없는 예수처럼, 노은과 함께 아버지의 시체를 지고 서재로 향한 죄 없는 요일은 이때부터 죄와 함께하게 되었다. 인류의 죄를 함께 짊어진 예수와 어머니의 죄를 함께 짊어지던 요일. 그 결과의 대비. 왜 아이들을 죽였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그럼 당신은 왜 아버지를 죽였냐며 되묻는 아들.

 

6.

뒤틀린 피에타로 완성되는 결말은 인상적이다. 노은은 아들의 죄를 정죄한 뒤 죄를 고하기 위해 세계 밖으로 나선다. 그가 정죄한 것은 누구의 죄일까. 그가 고하려 하는 것은 누구의 죄일까. 어쩌면 구분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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