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문학? 받고 SF.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고양이와 엘리베이터 – 2001(작은 상 탐) (작가: 니그라토, 작품정보)
리뷰어: bard, 19년 3월, 조회 187

*스포일러 있습니다

“내가 30년 만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들은 건, 온갖 다채로운 촌수를 자랑하는 친척들의 연이은 급사였다.”

오늘(3월 18일) 저는 곽재식 선생님이 연세대에서 하는 강연을 보러 갔습니다. 곽재식 선생님은 “듀나 SF를 통한 자아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매년 연세대에서 강연을 하는데요, 마침 월요일에 시간이 되었던 저는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연세대로 향했습니다. 강연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고 즐거웠는데요, 중간에 곽재식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90년대, 하이텔에서 사람들이 글을 쓰던 고생대 시절에 듀나는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소설을 쓰고 영화 평론도 하면서 인지도를 얻어 가던 초보 작가 듀나였지만, 듀나에게 가해지는 비판도 많았다고 전해 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죠. “듀나는 외국 SF에서 쓰던 소재를 가져 와서 독창성이 부족하다. 별로다.”, “듀나는 미문을 쓰지 않으며 문장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문장력에 문제가 있다” 등등. 그런 와중에 곽재식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듀나가 세계 최고라고 말하고 싶지만…

하지만 당시 게시판의 분위기(라는 게 사실 잘 상상이 되지는 않습니다만)에 거스를 수 없었던 곽재식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듀나 님의 소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라고 소심한 코멘트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듀나의 소설을 두고 문장력에 문제가 있다거나, 독창성이 없다고 욕하지 않습니다. 비판자들은 모두 죽고(Haters are all dead) 옹호자들은 여전히 소설을 읽고 씁니다. 결국 존버는 승리한다라는,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을 듀나 님이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니그라토 작가님의 소설 “고양이와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찬가지 묘사가 등장합니다. “특별히 모험을 좋아하는 재기 발랄한 친척들”이 모두 죽고, 이 돈을 잘 모아서 기금으로 굴렸던 ‘나’는 30년의 냉동 수면 뒤에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30년 뒤에 부자라고 한소리 할 수 있으려면 몇천 억 단위의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겁니다. 마치 듀나가 오랜 기간의 존버 끝에 한국 SF의 거장으로 인정받은 것처럼(곽재식 선생님의 표현으로는 “최거장”), 소설의 ‘나’ 역시 돈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숲 속에 있는 한 마리 고양이를 양녀로 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고양이의 이름은 르시, 그리고 놀랍게도 고양이 르시는 인간이 유전자 변형 수술을 받아서 고양이가 된,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퍼리였습니다. 더 놀랍게도, 아니면 덜 놀랍게도 르시는 남성이었고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으면서 자란 친구에요. ‘나’는 그런 사랑스러운 르시를 예뻐하면서 동시에 괴롭히기도 합니다. 이런 묘사를 보세요.

“나를 3류 SF영화에 나올 법한 깡통 사이보그로 바꿨다. […] 남은 몇몇 찌꺼기로는 눈알을 하나 만들어 냈다. 눈알에 원격 감각 기관과 통신기를 달아 내 일부로 삼았다. 르시를 설득해서 그녀의 왼쪽 눈을, 새로 만들어 낸 팔다리가 있어서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는 눈알로 바꿨다. […] 내가 만들어 붙인 눈인데도 르시의 분노를 담아내기엔 넉넉히 진실했다.”

르시는 ‘나’의 엉망진창한 성격과 일방적인 대우에 실망하고는 그의 품에서 벗어납니다. 그것도 팔다리가 달린 왼눈을 피투성이로 만든 채로. ‘나’는 르시를 찾고, 그녀(혹은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아버지를 처리합니다. 부자인데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 ‘나’는 르시에게 “지성은 과학적 한계까지 흩어지겠지”라고 신호를 전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르시는 오히려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보, 나는 니가 좋아.”

 

 

이 소설, 그러니까 “고양이와 엘리베이터”는 첫 문장부터 읽는 사람을 가리는 소설입니다. 펀치 라인이 너무 강력해서 사람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작가들(마이조 오타로)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척들의 연이은 급사였다”라는, 한 번의 강력한 펀치로 독자의 선택을 강요합니다. 계속 읽을 건지 아니면 리타이어하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건지. 저처럼, 니그라토 님의 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설을 계속 읽습니다. 그러다 보면 결말에 이르게 되고, 고양이의 마지막 말에서 어떤 의미로는 충격을 받습니다. 네가 좋다니? 학대에서 도망친 친구가 다시 자신을 괴롭히는 누군가에게 돌아가면서 하는 말로는 적절하지 않아요. 하지만, 왠지 그 감정을 아예 모른다고 이야기하기는 또 어렵습니다.

이 소설은 짧은 소설이지만 소재의 측면에서는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년, 고양이, 동성애, SF적 설정,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질문. 니그라토 작가님의 소설에서는 언제나 인간이 등장하고, 인간들은 편을 갈라서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뜨거운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만, 작가는 인간에게 약간의 유예를 허락합니다. 고양이와 엘리베이터를 읽다 보면, 그는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나약함을 벗어 던지고 다른 인간과 대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있으면서, 아직도 의구심에 빠져 있는 독자에게는 네게도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넌지시 고백하는 말이 들려 오는 것 같습니다. 왜 인간이 미래에도 인간일 수 있는지,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소설은 우리에게 생각하게 만들고, 곽재식 선생님이 그런 것처럼, 저도 이런 코멘트로 리뷰를 마치고 싶습니다.

니그라토 님의 소설은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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