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라! 인간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스타 글라디에이터 Star Gladiator (작가: 이재만, 작품정보)
리뷰어: 이두영, 19년 2월, 조회 84

1. <살아남아라! 개복치>를 기억하십니까

벌써 몇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5년 또는 그 이상일 게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통해 ‘개복치’라는 물고기가 꽤나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모바일 게임 <살아남아라! 개복치>는 그 유행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리뷰 쓴다고 오랜만에 보게 된 이 화면

처음엔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 게임을 왜들 그리 하고 있나, 싶었다. 그래놓고 막상 게임을 설치하고 플레이하니, 어느새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는 시간이 생겼다 싶으면 개복치 녀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황당한 이유로 사망할 때마다 헛웃음이 나오는 게 이 게임의 매력 포인트였다. 차츰 이 게임에 관심이 없던 다른 주변 사람들도 나처럼 개복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보다 이 게임을 늦게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는 지인이, 이 게임의 엔딩을 나보다 먼저 보았다.

그는 이 화면을 보여주면서 정말로 “감동했다”고 하였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리라.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직접 엔딩을 본 것이 아니라 남이 보여주는 엔딩 화면임에도 불구, 나 또한 이 화면을 보는 순간 ‘아…!’하고 속으로 경탄했으니까.

‘수명이 다해서 죽었다’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망이유. 여지껏 우스꽝스럽다고 할만큼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사망하던 개복치가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로 사망했다는 엔딩은, 그 수많은 어처구니 없는 사망의 이유들을 모두 넘기고 ‘곱게 살다가 곱게 죽었다’라는 말이지 않은가.

곱게 살고 곱게 늙어 곱게 죽는 것. 말이야 쉽지만, 막상 그렇게 사는 사람은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우리네 현실은 무사무탈 평온하게 ‘생존’하는 것조차 절박하다. ‘수명이 다해서 죽었다’라는 엔딩을 보고 뭉클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2. 촛불과 리본으로 쏘아 올린 ‘생존의 절박함’

2016년 겨울2017년 초봄, 대한민국 역사는 거대한 전환을 맞이했다. 대통령 탄핵 촛불 집회와 국회의 탄핵 가결 그리고 마침내 이뤄낸 대통령 파면. 그러자 쉴틈없이 속전속결로 치달은 차기 대통령 조기 선거. 물론 무능한 정권을 몰아내고 새롭게 선출한 행정부라고 해서, 새 정부가 무릉도원과 유토피아를 뚝딱 만들어주리라 기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몽상이요 망상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 겨울은 값지었다. 아무리 촛불을 들어도 이순신 동상 앞에 세워진 판넬벽과 물대포 앞에 무너지며 패배와 무기력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2008년과는 달리, 그 해 겨울은 국가수장을 몰아냈다는 성취를 이루었으니까.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라고 외쳤다. 대통령과 특수한 관계인 일개민간인이 국가행정을 쥐락펴락했다는 진실에 충격과 분노를 느껴 터져나온 구호이다. 그러나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태블릿PC로 촉발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하나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나라’가 ‘나라’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온 과정이 쌓이고 쌓인 끝에 태블릿이라는 방아쇠가 시민들을 격발시켰다. 그리고 나라가 나라답지 않다는 환멸감의 도화선 그 첫번째 지점은 2014년에 빚어진 참사로부터 출발했다.

행정부는 무능했고, 언론은 역대 최악의 오보를 양산했다. 비록 낡은 분류이나, 보수는 경제를 외치고 진보는 정의를 외친다고 나눌 때, 진보가 보수에 밀리는 취약점은 바로 그 정의가 올바르되 추상적이나 경제는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적이라는 인식, 이 부분이다. 경제를 외치는 목소리는 우리가 사는 직접적인 에 호소하지만,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선뜻 당장의 삶에 와닿지 않는다는 점, 바로 이것이다.

어째서 2014년의 비극이 대한민국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 그 도화선이자 신호탄인가? 바로 정의의 문제가 삶에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뼈아픈 고통으로 체감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국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초대규모 재난 상황에 국가가 우리를 책임지지 않았다’, 이것은 ‘정의롭지 않다’, 말인즉 지금 이 사회는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 정의의 문제가 의 문제로 전환되었을 때, 그 힘은 경제논리를 앞세우는 것보다도 강력한 호소력을 일으킨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나타나는 각자의 목소리들, 땅콩 하나를 이유로 산산조각난 인간의 권리라든가 언론 재벌 가문의 어린 딸이 노령의 운전기사를 상대로 일삼은 폭언, 좁게는 개인사이에 크게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비일비재한 갑질 문화 폭로, 분야를 막론하고 터져나오는 미투 운동 등은 정의(justice)의 문제이면서 또한 동시에 당장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삶(life)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읍소이다. 추상적 차원의 올바름 이전에, 당장,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위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생존(survive)의 문제이다.

공포의 종류는 공포를 일으키는 요인에 따라 다양할 것이나 그것이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불러일으키는 것은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공포’에 해당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취업준비라는 이름으로, 대입준비라는 이름으로, 군입대라는 이름으로, 자녀교육 및 육아라는 이름으로, 여자라는 이유로, 바로 그 공포를, 안전한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공포를, ‘생존의 절박함’을 늘 마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안전한 생존’이라도 보장받는 것이 최소한의 소망인,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곱게 죽는 게 목표인 한 마리의 개복치와 마찬가지로.


3. 생존이라는 위대한 승리

 

생존.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목표 중 하나. 삶의 다른 모든 목표들이 이뤄지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필수조건. 우리는 그 필수조건이 안전하게 보장되지 않음에 불안을 느끼고, 절박해한다. 사라지는 직업도 많고, 엉뚱한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당장 내일 교통사고가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돈이 많으면 해결될 것 같지만, 그 돈이 무슨 화근이 되지 않으리라고는 또 어떻게 보장받을 터인가. 대기업 비서실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요새 가장 핫hot한 점쟁이가 누구인지를 수시로 체크하는 것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흡사 전장터만 아닐 뿐, 우리네 삶은 전장터나 다름 없는 셈이다.

전장은 생존이 가장 보장되지 않는 예측불허의 상황이다. 우리는 이미 분단으로 말미암은 내전을 경험한 바 있다. 그 결과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보신주의가 우리 사회의 공기 중에 그 뿌리를 은근히 깊게 내렸다.

<스타 글라디에이터 Star Gladiator>는 바로 그 전장,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극단적으로 요동치던 바로 그 전장터에 내몰린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전장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 전장터는 형태만 달리했을 뿐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전쟁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발생한다. 지진이나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형 재난 속에서, 모든 것이 예측불가능인 상황에서, 남은 문제는 살아남느냐 죽느냐의 문제 뿐이다. 왜 이런 재앙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왜 나는 이런 고통을 겪어야하는가? 천재지변 그리고 천재지변에 가까운 전쟁 등은 이러한 질문, 즉 ‘왜 나에게…’라는 질문에 대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대답을 구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상황 속에서는,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다.

전장 같은 상황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란, 그러므로,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값진 성취를 이룬 셈인가.

<스타 글라디에이터 Star Gladiator>는 ‘생존이라는 승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당신 또한 ‘생존이라는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응원의 이야기이다.

살아남아라! 인간. 인간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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