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감상 입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요 몇 년간 제 독서 취향은 꾸준히 판타지에서 SF로 기울었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장편을 읽기에는 조금 피곤하기도 했고, 소재의 기발함이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건 SF가 더 많았거든요. 어느 정도는 브릿G의 영향도 있겠네요. 브릿G에 올라오는 SF 단편들은 재미있었거든요. 하지만 가끔은 판타지를 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잡게 된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모험과 운명과 사명과 환상이 느껴지는 제목이니까요. 소개말도 그렇습니다.
800년 전, 대마법사 안톤이 봉인한 피의 악마 ‘볼로스’의 힘을 얻기 위한 모험
대마법사와 피의 악마와 봉인이라니. 악마의 힘을 둘러싼 마법사들과 이단심문과 혈통의 비밀같은 게 떠오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힘에 취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상물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Devil of blood는 그런 제 기대를 무참히 배신한 소설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았습니다. 대마법사 안톤과 피의 악마 볼로스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소재입니다. 그리고 주인공들도 배경을 살피면 상당히 우울하죠. 주인공 중 하나인 베른은 시작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석화의 저주를 걸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부모님도 석화의 저주에 걸렸는데도요. 심지어 다음 날 아침에는 사형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베른을 구해주는 다른 주인공인 세르핀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비극이 있습니다. 이 캐릭터들로도 무거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는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글을 읽어보면 무시무시한 제목과 소개말과 달리 발랄하고 산뜻하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전반적으로 캐릭터들의 성격이 배경과는 달리 상당히 밝은 편입니다. 세르핀은 매우 긍정적이고 발랄하고 활력이 넘칩니다. 그 낙천적인 모습을 보면 정말 비극을 겪은 캐릭터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베른의 성격도 조금 겁이 많고 소극적인 모습이 있지만 그럼에도 필요할 때는 용기를 내는 성격입니다. 꼬마용 제이스의 순박한 모습도 그렇고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캐릭터들의 숨겨진 과거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어두운 면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태까지 읽어본 소설 중에서는 상당히 밝은 편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묘사, 특히 마법이 상당히 동화같다는 것도 분위기에 한몫합니다. 뿌리기만 하면 악취가 사라지는 스프레이, 꿈의 요정들이 나오는 향로, 공중을 떠다니면서 맛있는 차를 따라주는 주전자, 생각만 하면 자연스럽게 원하는 걸 가져다주는 마법 시종 등. 판타지 소설보다는 동화에 더 어울리는 마법이 주를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문체도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읽으면서도 좀 신기했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뜬금없을 정도로 직접적으로 설명을 하거나, 상당히 직접적으로 교훈을 말하거나, 하나의 설정을 말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분량을 소모합니다. 또한 다른 글과 달리 의도적인 줄 나누기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작위적이라거나 몰입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 그런지 조금 생각해봤는데, 제 경우에는 루이스 캐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실비와 브루노>는 운율과 온갖 말장난이 글 전체에 섞여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줄바꿈을 통해서 그런 동화같은 느낌이 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특히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법이나 아름다운 광경을 묘사할 때 그 장점이 커지는데 수사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이미지는 뚜렷하게 그려줍니다.
다만 캐릭터, 묘사, 문체처럼 세부적인 모습은 대체적으로 동화같은 느낌을 주는 데 반해서 핵심 스토리 전개는 동화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읽는 데 있어 자꾸 마음에 걸렸던 부분인데 동화같은 분위기에 비해서 조금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의 흐름이 끊임없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누구를 위해서 적은 건지 헷갈리곤 합니다. 동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거운 편이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판타지라고 하기에는 가벼운 느낌이 들었거든요.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느낌도 아닙니다. 서큐버스 부분은…이건 수위가 조금 높은 편이라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동화와 판타지 소설의 가운데서 흔들리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부분이 재미있긴 합니다. 42화까지 읽었는데 후반가면 어두운 분위기로 갈지,-개인적으론 작가분이 설정한 성향에 어둠이 있는게 조금 불안합니다- 아니면 끝까지 이런 분위기를 유지할지 저로서는 종잡을 수가 없거든요. 프롤로그에 나온 전체 목차를 보면 지금 절반이나 절반에서 살짝 안 되는 정도에 도달한 거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끝까지 읽을 거 같네요. 완결까지 기대하면서 읽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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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반쯤 졸면서 적다보니 다른 작품을 골라서 리뷰했네요. 다음 리뷰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같이 창을 띄어놓았거든요. 알려주셔서 감사하고 작가분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