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리뷰는 피어클리벤의 금화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에서의 ‘아이들’
아이들의 능동성이란 대개 허구적이다. 현실뿐 아니라 여러 매체에서조차 아이들은 좀처럼 능동적인 주체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은 현실적으로 보았을때 어느정도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때로는 더 나아가 아이들이 자신에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성숙하지 못하거나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악에 가까운 행동으로 비추기까지 한다.
물론 능동적인 아이들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도의 결과물로 여러 장치들이 발명되었는데, 그 중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초월적인 힘이나 존재의 등장이다. 피어클리벤의 금화에서는 ‘용의 인정’이 이러한 기능을 한다. “너를 먹지 않겠다”는 용의 선언과 후원의 약속은 주인공인 울리케의 행동 범위를 17세 소녀가 할만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곳 까지 넓혀준다.
그렇다고 해서 울리케가 모든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아니다. 울리케는 때로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하는가하면, 자신의 감정에 못이겨 일행을 위험에 빠뜨리기도한다. 자신이 가진 권한에 비해 드러나는 아이들의 한계 또한 그 동안 어린 주인공들이 나오는 이야기에서 많이 사용 되는 소재이기도하다.
피어클리벤의 어른들, 그들과 작가의 시선
하지만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재밌는 점은, 이렇듯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들에 대해 어른들의 개입이 최소화 되어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럴 수 있는 이유 중에는 용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울리케에 대한 용의 인정과 후원은 어른들의 개입을 일차적으로 차단한다(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점은 작품 외부에서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미치기까지한다). 하지만 울리케의 경우보다 더 단적으로 이러한 점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시야프리테와 그녀의 아버지의 경우이다. 시야프리테의 아버지는 시야프리테의 거의 모든 행동을 지적하고 꾸짖는, 그리고 때로는 학대적인 언행까지 서슴치 않는, 매우 고전적인 형태의 가장으로서 그려지지만, 시야프리테의 재능이 용의 인정을 받는 순간부터 시야프리테의 행동에 대해 개입이 전무하게된다.
이렇듯 용은 어른들의 행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어른들이 아이들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매우 관대하게보인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이들을 대리할만한 어른이 나타나길 마련이다. 울리케의 경우를 좀 더 현실적으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용을 비유하는데 아주 명확한 소재는 아니긴 하지만)핵을 발사할 수 있는 버튼이 소녀의 손에 들려져 있다고해서, 그 소녀에게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외교적 사안을 전부 전면적이고 주도적으로 해결하라고 어른들이 떠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전면에 어른이란 이유로 개입하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하지만, 피어클리벤의 어른들은 심히 이상하다. 그녀의 재능에 매우 순순히 탄복하고서는,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나서게 오히려 도와준다. 그녀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심하게 꾸짖거나, 그것을 죄삼아 그녀의 활동에 제한을 걸지도 않는다.
특히나 피어클리벤의 영주이자, 울리케의 아버지인 노아크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울리케의 행동에 제약을 걸만한 정당성이 아주 많은 인물이지만 매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그런 일들을 주도적으로 해결하기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울리케보다 노련하고, 경험이 많으며, 냉정할 때 냉정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이야기에서 매우 한정적이다(그리고 그것을 자처한다). 이러한 태도는 노아크 뿐 아니라 이야기 전반적으로 어른들에게 드러난다. 피어클리벤가의 어른들뿐 아니라 외부인물들(시그리드를 포함한 모험가들과 같은)까지도 말이다.
(단 한명, 예외적인 인물로 크누드가 있다. 크누드는 울리케의 행동과 생각들을 시험하고 지적하는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이는 그가 ‘재수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아이들이 어떤 일들을 함에 있어 ‘불안할수는 있지만, 두렵지는 않게’ 하는, 이러한 환경은 대단히 이상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적인 환경에 대한 시각은, 아이들을 지적하고 교화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어른들의 시각이라기보단, 오히려 아이들의 시선에 가깝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아이들의 행동을’ 정말 말그대로 ‘아이들의 행동’으로 바라보는 이런 시선은, 생각보다 정말 흔치 않다.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 그리고 아그니르
(이 부분은 비평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감상과 더불어 독자로서의 희망사항을 얘기합니다.)
아쉽게도, 울리케와 시야프리테 정도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이 이야기에서 크게 활약하는 아이들이 없다. 캐릭터의 설정상 당장 활약하기 어려운 발프리드가 그러하기도 하지만, 특히나 ‘용의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아그니르와 디드리크는 작품 내에서 인상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울리케만큼, 혹은 발프리드만큼이라도 용과 연결점이 없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특히 아그니르의 경우에는 작품 내부에서뿐 아니라 외부에서조차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 소설이 다른 플랫폼에서 연재하던 시절, 이 작품에 대한 리뷰나 댓글등에서 아그니르는 울리케와 비교되며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캐릭터중 하나였다. 심지어는 그녀가 아주 멋지게 활약하는 에피소드에서도 조차 그녀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꽤나 욕을 먹는 것을 볼수 있었다. 용의 존재는 이렇듯 작품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만큼 꽤나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아그니르를 잠재성이 아주 높은 인물로 평가하고싶다. 특히나 리뷰 초반에서 언급했던 주체성이나, 능동성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 더욱 그렇다. 용의 존재는 아이들의 행동범위를 넓혀주기도 했지만, 그만큼 부담을 주기도 하며, 이러한 힘이 일시적으로나마 사라질 경우 그 주체성을 잃을 우려도 존재한다(시야프리테가 가지를 잃고나서 얼마나 상심했는지, 또 그 뒤로 ‘무력하고 불쌍한 존재’로서 적국의 인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자).
아그니르의 경우,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 반대로 생각해보면, 용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녀의 능동성은 꽤나 오롯이 그녀 자신으로부터 오게된다. 그녀가 재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꽤나 뛰어나다(아그니르는 자기 자신의 재능에 대해 의심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것들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아그니르는 ‘침묵하는 어른들’이라는 환경을 배경으로 완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이 캐릭터로써 아주 훌륭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정말 반갑게도 최근에 들어서 이런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좀 더 본격적으로 진행 될 기미가 보인다. 작가분 또한 이러한 아이들을 어떻게 조명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아그니르에 대한 반응은 독자인 내가보기에도 꽤나 놀라웠으니말이다). 비록 이런 아이들이 작품에서 조금 어리숙하고 충동적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독자들이 그들의 실수에 침묵해주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었으면한다. 피어클리벤의 어른들처럼.
나지막한 곳에서, 가만히.
– 부족한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