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0
이 리뷰는 작가의 세 소설에 대한 통합 리뷰입니다.
이 리뷰에서는 작가가 평범한 사람들이 악역이 되어가는 과정을 어떤 식으로 설명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 해석은 작가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1
먼저 ‘소년과 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소설의 도입부에서 작가가 직접 언급했듯이 소년은 원래 흐린 날씨를 자신의 행복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원고지 2매 남짓의 짧은 소설의 20퍼센트를 소모하여 작가는 이 점을 묘사한다.
그는 흐린 날씨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둡고 바람이 몹시 불어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길을 잃고 비껴 떨어지는 그런 날씨를 사랑했다.
밑줄 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소년은 그저 흐린 날씨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이 사랑하는 것은 ‘바람이 몹시 불어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길을 잃고 비껴 떨어지는 그런 날씨’이다. 길가에 핀 꽃에게 있어서 매우 위협적인 날씨를 소년은 사랑한다. 이점을 고려하여 소년이 흐린 날씨를 원망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아! 날씨가 맑았더라면! 햇살이 이 꽃을 비추어 밝고 아름다운 그 원래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을 텐데!
소년이 흐린 날씨를 원망하는 이유는 그 날씨가 꽃의 삶 그 자체를 위협해서가 아니다. 흐린 날씨 속에서 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소년은 원망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만한 점이 있다. 소년이 흐린 날씨를 좋아하는 것은 ‘바람이 몹시 불어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길을 잃고 비껴 떨어지는 그런 날씨’가 꽃에게 위협적인 것 때문이 아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흐린 날씨와 꽃의 삶은 서로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이를 통해 작가는 평범한 사람이 악역이 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등장인물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에 갈등은 해소될 수 없다. 작가는 이런 운명에 처한 소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년은 흐리고 비가내리는 날씨에 밖에 나가 걷다 너무나도 예쁘고 마음에 드는 꽃을 발견하고 말았다.
소년은 꽃과 우연히 만나고 ‘말았다.’ 소년에게는 자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소년은 꽃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소년은 꽃이 밝고 아름다운 그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가정하였으며, 이를 슬퍼한다. 소년에게 꽃은 연민하고 멀리서 구경할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소년에게는 꽃을 구할 동기가 없다. 그러므로 소년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꽃을 다른 곳으로 옮길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채로 소년은 그저 꽃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악의가 없었음에도 소년은 악역이 되고 ‘말았다.’ 작가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소년에게 선역과 악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살펴보자.
하지만 지금 당장 흐린 날씨를 소년이 어찌할 순 없었다.
소년의 입장에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된다. 작가는 평범한 인물이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소년을 위해 설정해주었다. 소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못 해석하였고, 잘못된 문제를 설정하였으며 그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를 통해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안타깝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라는 말을 할 기회를 얻었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2
작가는 이러한 세계관을 ‘가정’에서 더욱 뒤틀어놓는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을 불행하게 하는 논리적인 이유조차 제시해주지 않는다.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인 ‘가난’과 그로 인한 ‘폭력’은 문장 몇 개를 통해 위태롭게 연결되어 있다.
그 아이가 사는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가정은 하나 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수며 싸웠다.
그 마을엔 깡패들과 창녀들이 넘쳐났고 아이들도 삐뚤어져 불량했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을 지니고 있었다. 아이는 집과 집 밖에서 모두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야 했고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는 자신이 왜 불행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아이에게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이는 제대로 된 논리를 구성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따라서 아이에게 있어 자신이 처한 상황은 ‘소년과 꽃’에 등장하던 ‘흐린 날씨’와 같고, 그러므로 이에 대해 ‘어찌할 순 없었다.’ 그러므로 아이는 이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아이’는 ‘소년과 꽃’에 등장하는 ‘꽃’의 입장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닥에 뿌리를 박은 꽃처럼 아이는 이 환경에서 스스로 탈출할 수 없다. 이 환경 속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구원해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아이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작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냉소적인 어투로 이야기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런 아이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일을 하고 늦게 들어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돈 몇 푼을 쥐어 주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에게 그녀가 오직 세상의 전부이며 존재 자체가 그 아이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대신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어머니’는 이야기 속에서 악역이 된다. ‘어머니’에게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을 것이다. ‘소년의 꽃’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평범한 사람이 악역이 되는 원인은 그의 무지에 있다. 그리고 작가는 ‘아이’의 죽음을 꽃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시드는 것을 묘사하듯이 담담히 이야기한다.
아이는 새벽녘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세상이란 원래 이런것이라고 생각하며 죽어갔다.
3
‘소년과 꽃’에서 ‘소년’이 악역이 되고 만 것은 그의 무지 때문이다. ‘가정’에서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악역이 되었다. 하지만 ‘가정’의 ‘아버지’는 어떠한가? 소설에서 ‘아버지’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와 같이 묘사된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로 묘사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마치 흐린 날씨 속에서 빗방울이 꽃잎을 세차게 때리는 것처럼 ‘아이’에게 폭력을 가한다. 작가는 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이러한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이 그런 형태로 변할 수 있을까? 작가는 단편 ‘친구’를 통해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다. 작가는 친구들이 남자에 대한 태도를 바꾼 이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은 실상 그 남자가 해 준 것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것들을 베풀고 그 남자가 해 준 것의 100배를 해주었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들은 그저 가난한 친구를 친구로서 대해주며 그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자신이 그 대접을 받을 땐 몰랐던 것이다.
처음 그들이 악역이 된 것은 무지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문장 끝에 덧붙였듯이 그들은 그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그들이 스스로를 속였던 그 시점부터 그들은 더 이상 자신 주변의 문제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사실들로 자신 주변의 일들을 덧씌웠고, 이를 진실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처럼 그들은 더 이상 의사소통을 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작가는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친구들은 그 남자를 부르면 자신들이 돈을 더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남자에게 점점 뜸하게 연락을 하였고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작가는 두 가지 요인으로 ‘친구’들의 변화를 설명한다. 첫 번째 요인은 ‘돈’이다. 작가는 여러 어구를 사용하여 소설 속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과 ‘친구’들을 서로 모이게 한 것도 돈이었고, 서로 대립하게 한 것 또한 돈이었다. 이 제재는 앞서 살펴본 소설 ‘가정’에서도 나타난다. 두 번째 요인은 항상 복수형으로 나타나는 ‘친구들’이라는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친구들’이라는 어느 집단에 소속됨으로서 그들은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될 수 있다.
4
그렇다면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들이 무지로 인해 악역이 되었을 때,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만약 그들이 자신이 악역이 된 것을 깨닫고도 스스로를 속이며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는가?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이 리뷰에서 살펴본 이야기들에 영웅은 없다. 집단 밖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잘 닦인 도덕관념으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는 그러한 영웅서사를 이 이야기들에서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식으로 주제의식을 발전시키길 원하려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