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사이다만 마실 수는 없지 않은가?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샨디아스 연대기―흑사자와 솔개 (작가: 강승우, 작품정보)
리뷰어: , 17년 3월, 조회 444

장르 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분들이라면 알고 계실 것이다.

작금의 장르 소설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백이면 그 중 아흔은 회귀를 하고 게임 시스템을 차용해서 레벨업을 한다.

과거로 돌아가 그간 쌓은 지식을 가지고 기득권에게 갑질을 해댄다.

독자들은 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문제다.

조금이라도 설탕의 단맛과 탄산의 짜릿함이 없는 소설의 댓글란에는 어김없이 그들이 등장한다.

아,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지?

갑질 언제 해요? 통수 언제 쳐요?

혹자는 이런 독자들을 보고 ‘사이다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이다 맛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니 사이다 중독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지만, 어쨌든 사이다패스가 혀에 착착 감기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사이다 맛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위스키를 들이밀어보자.

뭐라고 말할까? 당연히 쓰고 독하고 맛이 없다고 할 것이다. 위스키라는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떤 숙성과정을 거치는지 관심도 없을 것이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이다보다 위스키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위스키가 숙성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질 좋은 위스키를 찾으려 한다. 찾아서 입에 머금고 목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 맛과 향을 음미한 뒤 몸을 부르르 떠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러나 사이다만 파는 가게에서 위스키를 팔 가능성은 적을뿐더러, 설령 판다고 해도 하루에도 100개씩 나가는 사이다를 앞에다 진열하지, 반대로 진열하지 않을 것이다.

위스키를 사러 온 사람은 진열대에 가득한 사이다만 보고 입만만 다시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뒤져보면 괜찮은 위스키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사이다를 사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까.

 

샨디아스 연대기 – 흑사자와 솔개는 위스키 같은 작품이다.

사이다들 틈바구니에 있었다면 사이다패스들에게 외면받았을 위스키.

 

10화 까지의 분량만 가지고는 이 위스키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재료는 무엇인지, 얼마나 숙성이 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11화는 다르다. 내가 굳이 11화를 읽은 직후 리뷰를 작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 화에서 누안케는 루 아이리 메레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처녀병’이라고.

나는 작가가 일본 서브컬쳐에 심취한 사람은 아닌가 잠시 의심했었다.

처녀병이라니. 어쩌면 나 같은 음흉한 독자들로 하여금 묘한 상상력을 자극할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11화에서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처녀병이라는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유래가 있었다. 누안케는 11화에서 루 아이리 메레에게 그 단어의 유래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나는 작가의 스타일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아, 뭐든 쉽게 보여주지는 않을 모양이로구나.

 

이건 숙성이다. 1화에 가볍게 던진 단어 하나로 나라는 독자를 11화까지 붙잡아두었다. 그리고 그 단어의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 나는 잘 숙성된 위스키 한 잔을 마신 셈이다.

고작 단어 하나에 왜 그리 호들갑이냐고?

중요한 건 ‘처녀병’이라는 단어처럼 숙성 기간에 들어간 오크 통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 그 숙성 기간은 통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것은 10화만에 열어서 맛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은 최종장에 가서야 비로소 한 잔 들이키게 될 것이다.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여러분은 아는가? 앞으로 뚜껑을 열어젖힐 술통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양조장 주인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여전히 보리를 심고, 거두고, 증류하고, 오크통을 만들어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도 아주 조그만 옥의 티는 있다.

예를 들어 통에 라벨이 붙어있지 않다든지, 오크통 겉에 아직도 대팻밥이 붙어있다든지 하는.

그러나 그것이 위스키의 맛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이지 그것을 감싸는 통의 외형이 아니다. 라벨은 찍으면 되고 대팻밥은 깍아내면 된다. 앞으로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잊을 뻔 했는데, 샨디아스 연대기라는 위스키를 팔 장소를 마련해준 황금가지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제야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그에 걸맞는 장소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황금가지가 아니었다면 샨디아스 연대기는 사이다패스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 치였을 것이다.(위스키 맛도 모르는!)

 

끝으로, 만약 당신이 위스키를 비롯해 오랜 시간을 들여 제 맛을 찾아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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