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시선-‘스토아적 죽음’을 보고 이 글로 넘어왔습니다. 단문 댓글로 쓰려다 길어질 것 같아 리뷰로 적습니다. 쓰기에 앞서 우선 저보다 글 잘 쓰시는 분께 공감이 힘들다는 글을 쓴다는 일이 참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되면서도 솔직한 감상을 써보는 것도 좋겠다 여겨 글 올립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자 확실한 오류는 제목에서와같이 고양잇과 동물을 잡식으로 쓰신 부분입니다. 여주인공 윤정이 아무리 먹을 게 없다곤 해도 버터 바른 풀을 준 것은 무척이나 무식한 짓,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이 되어 버려서요. 사실 개든 고양이든 사람 먹는 과자를 생각 없이 던져 준다는 부분에서 이미 아웃이죠. 모르셨다면 조금이라도 검색을 해보셨어야 했습니다.
판타지의 가상 동물이나 미래의 유전자 조작 동물도 아니고 현실 기반의 동물이라면 처음에는 모르고 사람이 먹는 과자를 줬더라도 나중에 이게 정말 심각한 실수임을 깨닫고 주지 않았다가 되어야지 고양이의 분변 맛동산의 말장난으로 귀결되는 결말은 개그조차 못 되는 엉성한 오류로 그쳐 현실감도, 몰입감도 방해를 받습니다.
개는 잡식이 맞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철저한 육식입니다. 가끔 귀리(캣글라스)를 먹는 행위는 뱃속에 쌓인 털을 토하기 위함이지 영양을 얻기 위한 행동은 아닙니다. 물론 고양이도 몇몇 채소-단호박, 오이 등은 먹어도 무탈하지만 이런 종류는 제한적이며 양파와 마늘류는 급성 빈혈을 일으키는 독이 됩니다. 개도 마찬가지이며 과일 중에 포도 역시도 두 동물에게 극약이 되기로 유명합니다. 초콜릿도 그렇고요. 일단 동물에게는 그 동물용으로 만들어진 간식이나 사료를 줘야지 무턱대고 사람이 먹는 것을 주는 일은 관련 정보가 많이 없던 옛날이면 모를까 현재는 훈훈한 장면으로 쓰일 수 없게 된 지 오래입니다. 차라리 남주인공이 생으로 던져준 쥐가 정답이죠.
다음으로는 오류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공감이 힘든 부분입니다. 각 나라나 인종에 대한 묘사가 너무 스테레오 타입으로만 이뤄져 현실감을 떨어뜨리고 있다 여겨져서요. 한국 공항의 번잡함이 유럽에는 없다던가 한국인이 백인종을 슬슬 피한다든가 하는 철 지난 시절 묘사 말이죠. 이 번잡함이 사람 수를 뜻해도 그렇고 질서 의식을 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은 어디나 번잡하긴 매한가지니까요. 물론 한국인의 성급한 면도 거짓은 아니고 어글리 코리안도 많이 있기는 합니다만 공항은 여러 인종이 뒤섞이는 장소임을 간과한 묘사로 생각되어 잘 다가오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해 영포자가 많은 게 사실이니 외국인에게 불친절한 부분이 그닥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10년 전처럼 슬슬 피할 정도는 아니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흔해져서죠. 마트나 전철역에 가보면 가족 단위로 나들이 나온 여러 피부색의 사람들이 정말 여기저기서 흔하게 보입니다. 물론 이건 지역 차가 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또한 정규군 훈련을 받은 용병이 힘 조절을 못 해 동물원 알바생을 패대기친 장면은 너무 과했거나 불필요한 부분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남주인공이 훈련은커녕 기본 교육도 못 받은 무뢰배로만 보이는 역효과가 나면 났지 개그는 될 수 없어 보입니다. 툭하면 산전수전 겪었네 되뇌며 사람 무시하는 속내부터가 소시오패스 스럽고. 그런 인물이 쌍안경으로 여자를 훔쳐보면 그건 스토킹이지 소심한 귀여움과는 일절 연이 없어져 버립니다. 특히 훔쳐봤다는 행위 자체는 남녀를 막론하고 비호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결국 이 매트라는 인물은 열폭 해 폭력이나 휘두르는 열등감 마초가 될 뿐, 원하시는 순정 마초가 되기엔 이미 작중에서 캐릭터 붕괴가 일어났다는 뜻이죠. 해적선의 소년병을 명령을 무시하고 사살한 전적이 있기에 더더욱. 친구 다나카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농담이랍시고 던지며 과자를 보고 선조들이 아시아에 전파한 선진문물 운운하는 우월감에서는 위선마저 느껴지더군요. 백인우월주의가 사라지지 않았다지만 동양인 여성을 사랑한다는 인간이 이 부분을 깨닫고 고치는 장면이 없어 그냥 진정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살인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가진 인물로 미는 편이 더 설득력을 가졌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여주인공 윤정이 강조하는 ‘여성성’이 정작 한국 여성이 읽기에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좀 ‘유치하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윤정이 싫어하는 단어 ‘귀여움’, ‘약함’, ‘보호가 필요함’의 반대어는 절대로 ‘세련’, ‘기품’, ‘섹시’ 등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죠. 단어들이 다 비슷한 궤이기에 아프리카에 홀로 보건사업을 올 정도로 강단 있고 진취적인 여성이 화장품과 남자한테 시집갈 걱정을 그 장소 그 시간에서 하는 일 만큼이나 캐릭터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성에 대한 신격화는 시대가 지났고 “여자로서 역할을 다 한다”의 여자라는 단어는 ‘어른’, 혹은 ‘프로’라는 단어로 쓰일 때에야 더 상황에 알맞게 됩니다. 여성성에 대한 때늦은 표현은 먼저 읽은 ‘스토아적 죽음’에서도 느껴졌었습니다. 그야 전통적 여성상을 간직한 여성과 팜므파탈은 앞으로도 계속 우려 먹힐 소재임은 분명하지만 그 표현이 자연스러움보다는 작위적으로 다가오기에 그렇습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는데 늘어난 분량만큼 분수를 넘는 비판글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양이 이외의 부분은 사실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적 감상이기에 걸러 들으시면 좋겠다는 글을 마지막으로 리뷰를 마칩니다. 앞으로도 건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