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엔 작품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상당히 많습니다. 작품 본문을 먼저 읽고 보시길 권합니다. 리뷰 본문은 아래 스포일러 방지 태그로 접어두었습니다.
‘우주탐사선 베르티아’의 도입부는 친숙한 클리셰지만, 이어지는 미스테리와 사건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1) 지구는 왜 파멸했는가? 2) 탐사대가 우주의 중심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미스테리가 작품을 끌어가는 핵심인 듯 하고요. 이 둘은 다시 얽혀서 3) 탐사대원들의 정체에 대한 진실로 이어지지요.
작품에서 가장 큰 반전은 역시 3) 탐사대원의 정체에 관한 것이라고 보고요. 되돌아보면 소설 초입부터 좀 무리해보이는 설정이다 싶은 부분들이 훌륭한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60살이 넘었지만 30대 같은 탐사대원의 신체라거나, 우주에서 보낸 ‘긴 시간’이 정신적인 면에서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점 등에서요. 포모나가 대원을 관리하는 방식이란 것도 수상쩍기 그지 없는데, 이런 부분들이 마지막 진실과 잘 맞물리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반면 1) 지구 문명의 파멸과정과 2) 탐사대가 우주의 중심에서 발견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극적 설정이라는 인상이 짙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작위적인 인상이 짙어요. 250억의 인간과 인공지능으로 이뤄진 행성신경망(PNN)이 하나의 자의식을 갖춘 존재처럼 작동하고 자신이 이 우주에 유일한 외로운 존재라는 걸 깨달아 자살했다 라는 이야기인데요. 과감한 상상력과 낭만성은 인상적인데, SF로서의 설득력은 좀 약하게 느껴집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행성신경망의 작용은 굉장히 강력한 반면, 그를 구성하는 개개인은 군체의식의 부속품이나 다름없게 그려지고 있거든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좀 헐겁고 편의주의적이란 느낌이 있어요. 독자를 놀라게 하는 반전 미스테리로선 뛰어나지만요.
행성신경망과 반대로 베르티아 탐사선의 GANNet 구성원들은 원래는 자의식이 없는 네트워크의 부속품으로 출발했다가 우주의 중심에서 정보의 홍수를 접하고 오히려 개별성을 얻었습니다. 이런 개성과 자의식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각 구성원이 진실을 추구하며 대립하다 서로 죽이기까지 하는 갈등에 있겠지요. GANNet의 구성원들은 단일 시스템으로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의식을 갖춘 개인으로 각성해 분열한다는 점에서 지구의 행성신경망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입니다.
지구 행성신경망의 폭주든 GANNet의 각성이든 일으킨 원인은 하나입니다. 우주의 중심에서 얻은 지식이지요. 지구 행성신경망은 자신이 이 우주에 혼자라는 진실에 낙심해 우울증을 겪다가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고요. 반면 우주의 중심에서 직접 정보의 홍수를 맞닥뜨린 GANNet은 네트워크의 구성원들 개개인이 각성해 자의식을 얻습니다. 이 모순은 흥미로워요. 하지만 이유는 그리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행성신경망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다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규모의 신경망이 꼭 이렇게 인간처럼 사유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입니다만), 베르티아 탐사선 GANNet의 시스템들이 각기 인격을 갖게 된 이유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이런 부분에선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인터스텔라]에 묘사하는 초월 차원 같은 신비주의 느낌이 듭니다. 취향 차이겠지만 좀 과하게 낭만적이에요. 여튼 우주의 중심에서 발견한 ‘금단의 지식’은 지구와 베르티아 탐사선 모두에 파멸적인 변화를 가져온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행성신경망이나 군체의식의 발생 같은 소재에 더 천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아예 우주탐사선 베르티아를 내보낸 것 자체가 지구 행성신경망의 의지였다고 볼 수도 있겠고요. 이게 행성신경망 차원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이후 500년 동안 정작 인류 사회에선 무신경했던 것도 설명할 수 있겠죠. 우주의 중심에서 전해진 정보에 반응한 것 역시 인류 사회가 아니라 행성신경망이었던 이유도 되겠고요. 한편, 지구의 행성신경망 자체가 발생한 과정이나 그 지향성에 대해서도 그럴싸한 설명이 덧붙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구 내 통신망이 점점 발달하고 연결성이 강화되면서 행성신경망 전체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의식을 갖추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도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서 끝없이 더 많은 연결과 교류를 추구하는 게 행성신경망의 속성이었다고 해도 되고, 이러면 우주 너머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 우주의 중심으로 탐사선을 보냈다… 라는 전개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른 분 작품세계에 이렇게 참견해도 되나 모르겠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작품의 의문점 하나인데, 루나리아는 어째서 이 금단의 정보가 지구로 흘러들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지구에서 벌어질 비극을 예상했기 때문에 위진시앙을 해킹해서 지구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늦춘 것인데요. 원래 자의식이 없던 GANNet의 시스템이 자의식을 갖고 깨어난 걸 파악했다곤 해도, 그게 지구에 미치는 영향까지 알고 판단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에요. 우주의 중심에서 얻은 정보를 직접 분석하고 그 파국을 예상할 정도의 능력이 있었던 것인지… 그렇게 보자면 단일 인공지능으로서 루나리아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거든요. 소설에서 불가능은 없지만요.
주제넘게 이것저것 넘겨짚은 건 아닌가 싶지만… 이렇게 읽은 독자도 있다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도 나누면 좋겠다 싶고요. 여튼 흥미롭게 읽었고 이래저래 생각해볼 구석이 많아 좋았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