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흔히 보는 문들이 새로운 공간으로 연결되면서 일어나는 혼란을 다룬 판타지 스릴러 단편이다. 평범한 아파트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 박 과장은, 어느 일요일 집에서 쉬던 중 화장실 문으로 난입한 사람들에게 쫓겨 작은 방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다시 방문을 열 때마다, 눈 앞에는 다른 세상들이 펼쳐진다.
가장 편안한 쉼터인 집이 한 순간에 지옥으로 뒤집혀 버리면서, ‘안전한 곳’ 따위 없는 진정한 하드코어 서바이벌이 시작된다.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정글 한복판과도 같은 상황에서,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작품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들이 펼쳐지면서 엄청난 흡입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인지, 창 밖에서 총을 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은 또 무엇인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으며, 작품 내내 주인공의 생존게임에만 온 힘을 집중시킨다.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주인공은 일요일인데도 학교에 간 딸이 문을 통해 전주에 숨어 있음을 알게되고, 딸을 구하기 위해 행동을 시작한다. 아내와 함께 방문을 열고, 한국 어딘가 위치한 아파트 옥상으로 나온다. 계단을 내려가 차를 찾는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주인공은 한시도 숨을 돌릴 수가 없다. 언제 누가 공격해올지 모르는 긴장감은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도 그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차를 구하는 사이 아내까지 괴한들에게 빼앗긴다. 다음 순간, 주인공은 문을 통해 사태가 발생하기 3일 전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은 집을 생존을 위한 요새로 개조하기 시작한다. 필요한 물자를 쌓아두고 집 안의 문을 전부 없애버린다. 사태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주인공은 이전과 달리 자신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이 어느 정도 풀리려는 찰나, 그 끈은 순식간에 다시 조여온다. 장롱 문 너머에서 누군가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뗄 수 없이 치닫는 전개는 재미를 확실히 보장한다. 소중한 가족을 상실하는 장면에서 오는 아찔함 때문에, 가족들을 지켜내는 결말부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아내와 딸의 캐릭터는 사실 특별한 개성이랄 것도 없는 평이한 존재들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정도 분량의 단편에서 희생자로서 소비되기에는 충분한 수준의 존재감이다. 실제로 이들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부분은 극적인 상황이 9할, 캐릭터성이 1할 정도 되는 것 같다.
문이 마구잡이로 연결되면서 오는 혼란이 세상에 퍼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결말부는 이에 대한 해답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즉, 주인공처럼 이런 사태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기 전에 남을 먼저 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러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혼란이 점점 더 가속화되었을 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무기라고는 시체에 꽂혀 있던 칼 한 자루 뿐이던, 피해자 포지션이었던 주인공이 공기총으로 무장한 가해자로 변모한 것도 이와 닿아 있는 부분이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인의 노력은 계층의 피라미드를 몇 층 올라가는 수준에서 마무리될 뿐, 이 혼란의 주범인 피라미드 자체를 뒤흔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피라미드를 더욱 공고히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