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객관적인 리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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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노력만 가상합니다.
이 리뷰는 후회하는 사냥꾼의 아들(6) 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런 글이 있죠. 예쁘고, 친숙하고 어딘가 마음 가는 그런 거요. 아마 일본인들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는 마음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나라의 문화가 그대로 녹아들어 저도 모르게 실웃음이 나오는, 마치 우리네 전래동화처럼요.
그래서 제 세번째 리뷰의 제목은 Spirited Away입니다. 한글로 그린 세상에 구름이가 치히로처럼 헤메는 이야기죠. 길이 험난하긴 하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어쩐지 친숙하니까요.
세계관
‘한국적 판타지가 무엇이냐’ 라는 명제는 정말 지루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모든 판타지 소설의 기원은 ‘신화’인데, 한반도의 신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거세되다시피 했으니까요. 이제 우리에게는 깡철이나 미르라는 말보다 토르나 로키가 훨씬 익숙하죠.
이번에 리뷰할 소설 ‘비를 내리는 소녀’는 그러한 현실에 발을 거는 듯한 도전적 시도가 엿보입니다. 돌고래나 무당이라는 단어를 으레 쓸법한 자리에 상괭이와 차차웅이라는 순우리말을 넣고, 필요할 땐 각주까지 달아가며 독자를 구름이의 세계로 끌어당기죠. 물론 일부러 생소한 단어를 쓰고 따로 설명을 붙이는 게 좋은 세계관 전달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만큼은 예외입니다. 그야 익숙하니까요. 한글로 이루어진 사람과 초월적 존재들. 흔히 보지 못한 세계관임에도 거부감이 훨씬 덜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만 해서야 일개 전래동화일 뿐이겠죠. 비를 내리는 소녀의 세계는 신화임에도 현실에 한발을 딛고 있습니다. 보통 구름 속 신선처럼 여겨져야 할 ‘미르’들이 거북이나 상괭이(돌고래)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다 하고, 그 수장인 미르한은 마치 인간처럼 권력욕에 휘둘리며, 여우겨레나 도깨비들도 동화적 데포르메가 아닌 현실의 선과 악을 모두 담아낸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가님이 왕좌의 게임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작중 여러 ‘겨레’들이 웨스테로스의 칠왕국이고 주적인 ‘나티’들이 겨울과 함께 오는 백귀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쉽더군요. 그 때문에 비를 내리는 소녀의 세계는 Spirited Away를 닮았지만 다른 방향성을 가집니다. 잔혹한 ‘동화’를 넘어선 잔혹한 ‘현실’을요.
스토리텔링
작가분 말씀으로는 이전에 비해 플롯이 상당히 바뀌었다 하시더라고요. 다른 분들이 쓰신 이전 리뷰를 보고 뭐가 바뀐 지 짐작은 했습니다. 감히 예상하건대 ‘극의 긴장성’을 가장 많이 건드리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구름이는 끊임없이 구릅니다. 쉴새 없이 위기가 덮치고, 이제 좀 쉴까 하면 또 이어질 위기에 대한 복선이 나타나죠. 이런저런 떡밥도 흥미롭고요. 아직 진행이 많이 된 게 아니라 기승’전’을 보여주시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기승’이 가져야 할 긴장감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지만요.
캐릭터
현재까지 등장한 캐릭터들은 흠잡을 데 없습니다. 다 필요한 위치에 놓여 제 역할을 하는 캐릭터들이죠. 그런데 그 이상이 보이지 않아요. 작중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자기 위치, 자기 역할에만 충실합니다. 미르는 미르답고, 도깨비는 도깨비 답고, 나티도 나티답고, 여우구슬조차 여우구슬답습니다. 위에서 장점으로 말했던 친숙함이 캐릭터 부문에서 만큼은 단점이 된 거 같습니다. 익숙하기에 예상 가능하고, 예상 가능하니까 모든 긴장감이 ‘사건’에 치중됩니다. 막판에 나온 피바라기 복선조차 같은 맥락으로 예상 가능하죠.
개성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독자의 예상을 깨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만화적, 극적이어야 하죠. 평범하게 제 역할에 충실한 캐릭터는 순문학에서는 장점이지만 장르소설에서는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피를 마시는 새에 등장하는 사라말 아이솔을 정말 좋아합니다. 위에서 말한 ‘극적’ 캐릭터의 끝판왕이죠. 그는 제국의 율형부사(법무장관)로서 모든 일을 엄격.진지.근엄하게 처리합니다만, 그 방식이 상식을 아득히 벗어납니다. 어느 늙은 귀족의 자살시위를 막기위해 황제 면전에서 돌연 춤을 춘다던가, 바둑을 두던 중 돌로 ㅗ을 만들어서 (…) 상대에게 정치적 경고를 보낸다던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악역의 부재입니다. 작중에 제대로 등장한 대적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이무기를 필두로 한 나티들인데, 얘들은 ‘악’이라기 보다는 본래 신화의미 그대로 천재지변에 가까운 이미지입니다. 전래동화라면 눈에 띄는 악역이 없어도 문제가 없을 테지만, 이 소설의 분위기는 겉만 메르헨이지 디테일은 왕좌의 게임에 가깝습니다. 매력적인 악역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등장시키는 게 좋겠죠.
못 다한 이야기
위 리뷰는 철저히 구름이 1화에서~모불메의 봄까지. 즉, 구름이 파트에만 한정된 내용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어지는 범돌이 파트는 (제 기준에서는) 이런저런 의미로 본편과 동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돌이 파트만 따로 제 스타일에 맞게 스토리텔링, 캐릭터를 나눠서 리뷰하겠습니다. 스토리텔링 우선 이야기의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작중 메인 플롯은 분명 여우사냥인데, 결말은 거마설이 되기로 한 범돌이며, 과정은 강간이라는(결국 미수로 그치긴 했지만) 충격적인 소재입니다. 즉, 여우사냥->강간(우연)->거마설 등장(우연)과 영입… 이렇게 진행되는데, 뒤에 두 플롯이 전부 우연이다 보니 여우사냥 자리에 뭘 넣던 스토리 진행에 지장이 없습니다. 거마설과 여우가 완전히 따로 노는데 강간이라는 초강력 접착제로 억지로 붙여놓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 부분 플롯은 좀 더 정련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 구름이까진 괜찮았습니다. 세상의 부조리에 ‘분노’를 표출하는 어린애가요. 그런데 범돌이까지 똑같이 반응하는 걸 보니 겹친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저도 물론 세상에 그대로 맞부딪히는 당돌한 캐릭터를 좋아하긴 합니다만, 그게 둘이 되면 매력이 바래기 마련이죠. 또한 ‘검은 사내’와 ‘후회하는 사냥꾼의 아들’에 나오는 강간범 2인방 모두 거마설을 등장시키기 위한 소모품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작가님이 현실적인 범죄자를 다루고 싶다 하셔서 목적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더 극적이고 매력적인 플롯–비극으로 범돌이를 몰아세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강간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제 소설에서 산채로 화형 같은 살벌한 짓거리를 하긴 합니다만, 강간은 그것과도 차원이 다른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맞닿은 정도가 다르니까요. 용에게 마구잡이로 끌려가고, 상어와 물속에서 싸우고, 나티를 피해 도망 다니고. 구름이가 겪은 일은 위험천만할지언정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을 겪을 거란 생각을 아무도 안하니까요. 화형도 마찬가지죠. IS 쯤 되는 정신 나간 집단 아니면 아무도 그런 짓 안 합니다. 하지만 강간은 당장 주변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는 범죄입니다. 전혀 환상적이지 않아요. ‘판타지’라는 완충지대 없이 묘사되는 범죄는 충격의 강도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조커가 웃음가스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건 ‘판타지’로서 익숙하고 19금도 안 달리지만, 같은 소재인 강간을 묘사한 베르세르크나 헬싱은 비슷한 작품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잔혹한 세계관으로 분류됩니다. 그마저도 잠깐 스치듯이 묘사될 뿐이고요. 구름이와 환상적인 여행을 하다가 갑자기 완충지대 없는 현실에 내던져지니 충격이 배가 됩니다. 뭐, 처음부터 그런 괴리감을 노리신 거라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강간이라는 소재는 조심히 다루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각설. 간만에 취향(…?)에 와닿는 글을 읽어서 즐거웠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진행 좀 해주십시오. 휴재 빌런은 저 하나로 충분하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