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삭막하고 무리한 리뷰일지도.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악당이 세 명 나옵니다.
1. 비형랑.
알기 쉬운 악당입니다.
숭불 정책이 시행되며 불교 관련 건축 토목이 활발해지자 그 기회를 잡습니다. 지귀 같은 고아나 천민들을 착취하며 무리한 공사를 해서 명성과 부를 얻습니다. 공사를 얼마나 빨리 끝냈던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개입된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또 이용합니다. 아마 불교계에서도 조정에서도 그런 소문은 쓸모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끝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집사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럭저럭 응보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지귀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긴 자입니다.
삼독 중에서는 욕심, ‘탐’에 해당하는 자일 것입니다.
2. 영묘사의 중.
독사같은 자입니다.
숭불 정책에 편승해 밥을 먹던 자였겠지요.
시대를 좀 앞서갔을지는 모르나 정당한 분노를 가진 지귀를 ‘마음에 불을 품으면 삶이 괴로우니라’라는 식의 부정적인 말들로 찍어누르며 마치 문제가 지귀에게 있는 것처럼 몰아갑니다. 또 ‘이생에 공덕을 쌓으면 내세에 귀한 사람으로 나지 않겠느냐’는 가증스러운 체제유지용 공수표로 지귀가 현세에 삶에 만족하도록 현혹합니다. 중이 되면 어떨까 생각하는 지귀를 다른 길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면서 중이 되기에는 부적격자라 하며 막습니다. 지귀를 싫어하는 건지, 아니면 심지어 같은 천민 출신으로서 지귀가 중이 되면 자기 몫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지귀가 인생을 비관하고 결국 분신자살을 택할 때, 지귀를 막지는 않고 금줄을 쳐서 화재 피해만을 막습니다. 마치 지귀가 죽기를 바란 것 같기도 합니다. 지귀 같은 자가 없어지면 세상이 더 평화로워질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살던 절이 불타 잠시는 고생했을지 모르나, 아마 다른 절로 가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겁니다.
지귀의 정신을 갉아먹은 자입니다.
삼독 중에서는 성냄, ‘진’에 해당하는 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뒤집혀 있습니다.
성내야 할 때 성내지 않고 심지어 정당하게 성내는 사람을 찍어누르는, 정 반대의 독을 품은 자입니다.
3. 선덕여왕.
나라 안팎의 우환을 현실도피적인 숭불 정책으로 해결하려 함으로써 비형랑과 영묘사의 중 같은 자들에게 양분을 제공한 자입니다. 어찌 보면 원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의도는 나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하던가요.
이 이야기에서 지귀는 귀족들만을 탓하고 왕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글쎄요, 탓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운명이어서 그랬던 걸까요. (사랑이라, 실제 역사를 보면 선덕여왕은 즉위했을 때 이미 40대 혹은 50대였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지귀는 악덕 건축토목업자 아래에서 노가다를 뛰는 자인 것으로 보면 20대 초중반 정도일 듯하니, 거의 엄마와 아들 정도의 나이차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사랑에 나이가 중요하겠습니까만.)
지귀에게 죽음을 안긴 자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살까지 하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삼독 중에서는 어리석음, ‘치’에 해당하는 자일 것입니다.
어리석음이라,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에서는 원래 선덕여왕의 지혜를 나타내는 선덕왕지기삼사 중 두 개(1.5개? 모란 쪽은 합작으로 묘사된 것 같으니)를 지귀의 지혜로 돌립니다. 연인들 간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시도였을 수 있겠지만 (천민이 여왕과 사귀려면 지혜라도 있어야죠!), 결과적으로 선덕여왕의 지혜 레벨이 약간 떨어진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모란 얘긴데, 원래 중국에서는 모란 그림에 나비를 그리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데, 나비의 한자가 80 노인을 가리키는 한자와 발음이 같아서, 모란 그림에 나비를 그리면 ‘부자로 80살까지만 사세요’라는 악담이 된다고 합니다. 선덕왕지기삼사가 실제였는지 아니면 숭불 정책 때문에 선덕여왕을 좋게 봤던 (혹은 자장이라는 중처럼 위엄 어쩌구 하면서 절을 지으라 할 만큼 선덕여왕을 호구로 봤던) 불교계가 지어낸 거짓부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란 얘기가 사실이라면 좀 그렇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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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좀 무리하게 엮어 본 삼독 삼악당론입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는 선덕여왕에 대해서 모란 이야기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사에도 별 관심 없고 드라마도 거의 안 보거든요. (선덕여왕과 관련된 드라마가 여러 편 나왔었더군요.) 저는 심지어 선덕여왕과 김춘추, 김유신이 같은 시대 인물이란 것도 몰랐습니다. 국사시간에 배운 건 아마도 뇌 속 임시 메모리에 저장했다가 시험 끝나고 즉시 삭제했겠지요.
그런데, 작품을 읽다 보니 지귀부터 시작해서 순수하게 창조된 캐릭터들이 아니고 배경이 있는 인물들 같아서 (무식!) 인터넷을 찾아봤고, 그 결과 선덕여왕 관련 이야기들을 (얄팍하게나마) 알게 됐습니다. 공부시키는 소설이라니! 좋았습니다.
작품의 문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좋았고 읽기에도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단 나누기에 약간 불만이 있습니다. 장면이 전환되는 부분이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곳들이 있어서 읽기가 약간 불편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입니다.
지귀가 개신개신 느릿느릿 꼼질대니 스님이 “해찰부리느라 해탈은 못할 놈이로고.” 하며 지귀를 남겨두고 나갔나이다. 스님이 나가자 지귀가 연등 만들던 색지를 오리고 접고 손 사이에 비비고 돌돌 말고 살짝 잡아 구기고 주름잡고 꽃잎을 겹겹이 겹치고 꽃술을 하나하나 심고 숨을 불어넣어 모란꽃을 만드니 마치 새벽에 이슬 맺힌 듯 생생하고 자태가 위풍당당하여 과연 꽃 중의 꽃 화왕(花王)다웠나이다. 법당 안 연화대좌에는 부처님이 앉으시고 부처님 무릎 위엔 종이모란을 품은 지귀가 앉고 절 마당엔 연등이 걸리고 탑돌이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손마다 연등이 들리니 연화만발하여 밤이 낮같이 환하고 이곳이 극락인가 싶으니 이날이 중춘 보름이라, 지귀가 밖을 구경하다가 두두리의 탈을 쓰고 홀로 연등 없이 반대방향으로 탑돌이를 하여 사람을 놀래키고 꽃 사이 벌처럼 사람 사이를 누비며 다니어도 사람들이 한 방향을 볼 새, 임금이 신하들을 이끌고 탑돌이를 하였나이다. 임금이 간절하게 나라의 평안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나 진지왕의 손자요, 천명공주의 아들인 김춘추란 자가 곁에서 앙잘거리니,
바로 앞에서 디테일한 대화가 나오다가, 한 문단 내에서 지귀가 모란꽃을 만들고, 시간이 지나 중춘 보름이 되고, 임금이 탑돌이를 나오는 장면 등등이 휘리릭 흘러 지나가니 그 변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 과정이 한 문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옛날 글 같은 분위기를 내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산만한) 저에게는 좀 불친절했습니다. 호흡도 고를 겸 좀 끊으면 좋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 마지막으로, 길달.
설화에서 초자연적인 것을 빼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갑자기 염라대왕이 나와서 살짝 당혹스러웠습니다. 이야기 전체를 말한 것이 길달이라는 얘긴데요, 이야기 안에 길달을 두둔하는 말들이 많았으니 길달 스스로 그런 것들을 말하면서 좀 쑥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면 염라대왕 앞에서 지귀의 말을 빌려 스스로를 변호한 것일까요? 죽은 시간차가 있는 지귀와 선덕여왕을 같이 묶어 보고한 걸로 보아 염라대왕의 판결은 시간이 좀 걸리는 듯 하니, 길달도 그때까지 염라대왕의 판결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