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짧은 작품이니 보고 오는 걸 권하고 싶어요. 정말로 재밌어요.
저는 글을 읽을 때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글의 도입부를 소리 내서 읽는 건데요. 제가 주의가 산만한 편이라 스스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고, 아무래도 이렇게 읽으면 자연스러운 문장을 고르기 쉽기 때문이기도 해요. 관심 가는 글이 하나 생길 때, 저는 도입부를 혼자서 속닥거리며 조금씩 읽어보다가, 적당하게 입에 붙는다 싶으면 그 글은 계속 읽어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그 글을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망설이게 됩니다.
‘책 읽어주는 그놈’은 서간체로 되어있는 짧은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지하철에서 보았는데요. 그 때 저는 지하철을 다섯 정거장 정도 타고 내릴 예정이었어요. 그 시간 동안 할 게 있나 싶어 브릿G 앱을 열고 짧은 분량의 글을 하나 찾아 읽으려 했고요. 그렇게 이 글을 보기 시작했는데 말입니다. 첫 번째 단락을 혼자 입술을 작게 움직이며 읽다가 조금 뒤에 입을 다물었어요. 그리고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음악 볼륨을 완전히 껐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이 글을 마지막까지 정신없이 따라가느라 내릴 지점을 놓칠 뻔 했어요!
‘책 읽어주는 그놈’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갖고 있을법한 독서법 하나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당연히 이런 식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독서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으니까, 자연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의 음성 지원을 하게 되잖아요? 눈으로만 따라가면서 확확 넘길 때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여러 인물들이 나오고 대화문이 이어지게 되면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입을 다물고 하는 낭독인 셈입니다.
저는 조금 전까지, 사립 탐정이 실종된 의뢰인을 찾아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하며 음모에 맞서 싸우는 추리 소설을 읽고 있었습니다. 탐정의 독백을 바탕으로 대단히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작품인데요. 글을 읽는 내내 주인공인 40대 남자의 관점으로 저는 이 글을 따라가고 있었어요. 그가 여러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눌 때마다 머릿속에서 그 광경을 연상하며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요. 저는 상상력이 부족한 편이라 쉽게 책을 읽기 위해 배우 얼굴을 사용하고 있어요. 시시한 방법이지만 특정한 연기자의 얼굴을 연상하며 인물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글을 따라가기 쉽거든요. 제가 방금 말한 추리소설에서 40대 탐정의 얼굴로 만들어 놓았던 사람은 배우 박용우입니다. 한데 목소리는요? 생각을 해보면 목소리는 박용우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 사람의 음성은 얼굴만큼 잘 모르거든요.
‘책 읽어주는 그놈’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그렇게 묻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저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소름이 확 돋았어요. 그렇게 오랜 기간 책을 읽으면서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이거든요. 등장인물의 얼굴은 아는 사람의 얼굴로 만들 수 있어요. 그렇다면 목소리는요? 책을 읽는 내내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 퍼지고 머릿속을 맴도는 그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 걸까요? 나는 대체 어떤 과정으로 그 목소리를 만들어내서 머릿속에서 이렇게 태연하게 재생하고 있을까요?
‘책 읽어주는 그놈’에서는 어떤 미지의 대상을 상정하고 그게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매우 불길한 존재로, 그에게는 목적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요. 하지만 그 존재감은 무척 강력해서 그걸 의식하는 순간 어떤 사람은 미쳐버리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사실 이런 정답을 작가가 던져줄 수는 없어요. 그래서 글 자체도 열린 결말로 끝나고 있고요.
제가 감탄했던 건 이 작은 아이디어를 이런 식으로 끌어낸 작가의 솜씨입니다. ‘글을 읽다 보면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오르잖아. 그게 누구의 목소리일까? 혹시 ○○○가 아닐까?’ 이런 식으로 묻고 끝났으면 무섭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한데 이런 식의 서간체로 꾸며서 속삭이듯이, 그러니까 스스로 화자의 말투를 연상할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가서 그 의도를 드러내 버리면 읽는 입장에서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제기에 가장 효율적인 서술이었다고 생각해요.
제 평생 가장 무섭게 본 영화 중 하나가 ‘식스 센스’인데요. 쇼킹한 결말로 유명한 영화이고, 그 영화와 관련된 모든 이슈가 반전에 집중돼 있습니다만 제가 그 영화에 끌렸던 건 결말보다도 그 영화에서 보여준 다른 이미지 때문이었어요. 거기서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하는 주인공 심리학자는 자신의 상담 대상이 된 아이에게 무의식을 끌어내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해서 글을 쓰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하는데요. 그런 식으로 아이가 공책에 적어 내려간 내용들은 무척 충격적인 단어들이었어요.
그 장면에서 저는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심연을 목격했던 것 같아요. 끊임없이 써내려가다 발견하는, 스스로도 모르는 자신의 본심.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런 접근법을 쓴다는 것 자체가 너무 그럴싸하고 무서워서, 저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공포에 떨었어요.
‘책 읽어주는 그놈’을 읽고 난 제 기분이 그렇답니다. 이 글을 처음에 저는 모모랜드의 ‘뿜뿜’을 들으며 혼자서 속닥속닥 장난처럼 읽었어요. 그러다 두 번째 단락부터 음악을 끄고, 입을 다물고, 머릿속으로 가상의 책 읽어주는 존재를 상정해가며 따라가기 시작했고요. 그 목소리는 단락마다 어떨 때는 개구쟁이의 목소리로, 어떨 때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로 바뀌었어요. 작가는 그 존재를 제 눈앞에 꺼내서 마구 흔들었어요.
이 글을 읽고, 다섯 정거장이 지났을 때 제 자리에서는 찬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걸 저와 같은 칸을 타고 있는 어떤 승객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이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도 무척 이상한 감정이에요. 수십 년간 셀 수 없이 많은 글을 읽으며 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목소리와 함께 하고 있었어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글을 읽으며 저는 그 감각에 눈뜨고 말았어요.
이제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저는 오늘 밤을 새 가며 조금 전까지 읽었던 추리소설의 나머지 분량을 읽을 작정인데요. 머릿속에서 탐정의 목소리를 재생하면서 저는 계속 두려움에 떨 것 같아요. 대체 내 귓전을 맴도는 이 존재는 무엇인지. 어떻게 그토록 자연스럽게 내 속에 침투해 있었는지. “너는 누구니?” 하고 내가 혼잣말을 했을 때 그 존재가 대답을 해 버린다면 저는 어떡하죠? 혼자 살고 있는 제가 과연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무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