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눈동자’는 살레모Salemo를 떠나는 한 남자에 대한 SF다.
편집부 추천의 글에도 올라와 있듯, 살레모는 어슐러 k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Omelas를 떠나는 사람들]의 오마주다. 묘하게도 르 귄은 이 단편이 수록된 책 [바람의 열 두 방향] 작가의 말에서 오멜라스는 오리건 주에 있는 ‘살렘Salem’의 도로 표지판을 거꾸로 읽어서 지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제부터는 소설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스포일러를 싫어하는 사람은 뒤로가기를 누르자.
하나. 살레모.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이 소설은 두 가지 시간 축을 가지고 흘러간다. 이런 형식은 드물지만 여러 전례가 있으니 새롭진 않다. 특별한 플롯 없이도 ‘미스터리’의 힘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읽게 만든다. 독자는 결국 밝혀질 끔찍한 진실을 알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두 개의 시간 축 때문에 이 소설은 읽기 어렵다. 탑이 무엇인지, 왜 살레모가 혼란에 빠지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몇 번이고 앞으로 돌아가면서 내용을 이해해보려 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 행성의 경제는 모두 탑에 의존했다. 청년들은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굳이 우주선을 타고 떠났다. 데이터 베이스에 탑은 존재하지 않았고, 우주선은 항로를 수정하다가 탑에 충돌한다. 살레모의 경제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절망하고 죽은 자를 원망한다.
하지만 살레모의 지도자인 노인이 다시 나타난다. 아직 우주선은 우주를 떠돌고 있으며 살레모를 찍은 영상을 신호로 보내왔다. 끔찍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이다. 함께 살레모를 재건하자고, 우주에서 아이들을 되찾아 오자고 말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삶을 다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절망 대신 희망이 살레모를 채운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추락하는 우주선을 보았다. 추락한 우주선의 잔해 속에서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우주를 떠돌며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불에 탄 시체가 되었을 뿐.
노인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진실을 알지만 숨기고 살아간다. 긍정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그 진실을 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지 못한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에서 2014년 4월 16일 과거의 그 사건을 떠올렸다.
둘. 내가 살기위해 희생당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이 문장은 내 소설 ‘짝사랑 문제’에서 한 여자아이가 밥을 먹기 전에 뱉는 기도다.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나는 처음에 “나를 위해 희생한”이라고 했었지만, 이 기도는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희생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니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가 옳다. ‘희생당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기도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가 ‘세월호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한 말을 들었다. 정치적 의미 없이 사실만 말하자면, 덕분에 정권이 바뀌었기에 감사하다는 것이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감사하다는 건 덕분에 내가 이익을 보았다는 뜻이니까. 그 이익은 정당하지 않으니까.
내가 살기위해 희생당한 모든 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이것이 내가 해야하는 기도가 아닐까 싶었다.
어슐러 k 르귄은 역시 작가의 말에서 아프리카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미국인들을 생각하며…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썼다고 말했다.
결국 두 작가는 “우리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셋. 어떻게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동물들을 희생시키면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채식주의자였고, 지금도 채식주의자인데 군대에서 고기를 먹고 있다. 부대에 음식물 반입은 금지되며, 급식은 육류로만 제공되고, 전투 식량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는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전투식량도 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들은 학교와 군대를 비롯한 급식에서 채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비판자들이 말하듯이 여기에는 여러 ‘현실’적 문제가 있다. 아직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사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사이 15분 안에 식사를 끝내야 하는데 밥버거도 도시락도 사먹을 수가 없었다.가족이나 동아리 사람들과 회식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저 찐빵을 하나 사먹는데 우지가(소기름)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사람들은 나에게 질문한다. 영양에 문제는 없는 걸까?1 채소도 생명인데 희생시키는 게 아닐까? 농사를 짓기 위해 야생 동물들의 터전을 빼앗는 것은 괜찮을까?2 늑대나 고양이 같은 육식 동물에게 고기를 주는 건 괜찮을까?
나는 그 모든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단순한 답이 있다. “하지만 고기는 맛있어.” 모든 모순에 간단하게 눈 감을 수 있는 답이다.
세상은 복잡하고 모순으로 가득하며, 우리는 그 모순적인 세상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희생 없이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모순을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려고도 한다. 과학 기술이나 부조리한 사회를 탓하며 자신은 어쩔 수 없다고도 한다.3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더 끔찍한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위협하기까지 한다.
어떤 이들은 문제를 직시하기에 오멜라스-살레모를 떠나기도 한다. 그게 답일까? 당신이 이곳을 떠나도 아이들은 여전히 죽어갈 것이다. 도망치는 건 답이 아니다.
결국 이렇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패배한다. 결국 단 한 명이라도 희생시킬 것이다. 유토피아가 찾아오더라도 이미 희생된 이들을 되살릴 수는 없다. 내가 지은 죄들을 사과하고 뉘우친다고 해도, 앞으로도 죄를 짓고 살아갈 것이다.
넷.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여러 이야기들에서 반복된 거짓말이 있다.
한 명을 희생시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이 우리를 속여온 거짓말이라 믿는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내가 행복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믿는다. 믿어야 한다. 그게 내가 짊어져야할 책임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그런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아직 모른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SF작가 아서 C 클라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
1법칙: 어떤 뛰어난, 그러나 나이든 과학자가 무언가가 “가능하다” 고 말했을 때, 그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가 “불가능하다” 고 말했을 경우, 그의 말은 높은 확률로 틀렸다.
When a distinguished but elderly scientist states that something is possible, he is almost certainly right. When he states that something is impossible, he is very probably wrong.2법칙: 어떤 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불가능의 영역에 아주 살짝 도전해 보는 것 뿐이다.
The only way of discovering the limits of the possible is to venture a little way past them into the impossible.
우리는 이 문제에 답을 모르지만 답을 찾아야 한다. 세상은 낭만적인 비유나 이야기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2014년 그 날의 잠수사들이 그랬듯 차갑고 어두운 바닷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죽은 아이들을 보게 되더라도 절대 포기하진 않겠다. 이 말 역시 그저 비유일 뿐이라 해도.
사실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더 절실하다. 절망하기에는 시간도 힘도 부족하다.4
나를 용서할 수 없지만 죄책감에 빠져살진 않겠다. 결국 죄책감도 무력감도 이기적인 감정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기 합리화하기 때문에. 죄책감에 빠져 있는 동안 아무도 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 현실을 닮은 허구라고 해도 싫다. 나는 도망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어가는 아이들을 어떻게 구할지 고민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다. 나 역시 그런 이야기를 쓰겠다.
그게 Salemo-Omelas에 대해 내가 내린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