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쓸 떄 스포일러를 피하지 않습니다. 본작을 읽고 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로 리뷰 제목을 올려 보았습니다. 논란이 많은 개념일 뿐 아니라 제 이해가 일단 부족해서 깊이 있는 논의는 힘들겠지만, 아이디어만은 매력적이에요. ‘악의 평범성’은 홀로코스트의 주범 중 하나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법정에 서서 보여준 평범한 공무원의 모습에 아렌트가 붙인 개념이지요. 차마 인간이 저질렀다고 믿고 싶지 않은 추악한 범죄를 주도한 사람이 미치광이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령과 법, 도덕에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커리어를 탄탄히 쌓고 싶어하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무섭습니다. 「가장 어두운 빛은 파랑」의 화자 김지선 간사를 보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이 말이 떠올랐어요. “재수없는 상사와 짜증나는 동료와 박봉을 견디며” “시키는 대로 통장 내역 살피고 영수증 붙이고 (…) 온갖 잡일”을 하는 김지선 간사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그는 정유미와 대화를 하면서 학생이 자신에게 눈을 마주칠 때 “일하는 보람”을 느끼고, 정유미가 “지금까지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것”을 이해하기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된 이해가 아닌 것이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명백히 보이지요. 김지선 간사는 “혼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상상이 되어서” 마음 아파하지만, 그건 상상이기보다는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에,” 내가 병들어 망가졌다는 생각에 밤마다 울던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을 고쳐준 수술을 정유미에게도 권할 뿐입니다. 하지만 정유미는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을 좋아하고” 있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본인이 정상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하는 인물입니다. “정말 이대로는 창녀만도 못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김지선 간사는 불안으로 받아들이지만 정유미는 ‘양성애자는 창녀만도 못한 사람이다’라는 명제에 의문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읽힙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듯, 김지선 간사는 스스로 정유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을 뿐 사실은 그의 입장을 전혀 공유하고 있지 못한 셈이지요. 텍스트 중 정유미의 대사와 김지선의 대사의 양적 차이만 봐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정유미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정유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미 양에게는 못할 말이지만 허구의 소설이라는 위안을 붙들고 이야기하자면, 그가 자살하는 결말이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유미가 수술 후에 김지선 간사와 같은 인물이 되어서 다시 얼굴을 비치는 결말이었다면 그야말로 악몽이었을 것 같습니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수술로 ‘고칠’ 수 있는 세계는, 결국 사람의 정체성을 재단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성적 쾌감을 느끼는 중추”와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도록”하는 호르몬, 심지어 기억에까지 손을 댈 수 있다면 사람의 머릿속에서 분노를 없애 싸움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군요. 통각 중추를 건드려서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겠어요. ‘반항’의 개념을 짓눌러 하나의 정권 아래 평화로운 유토피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황제가 하늘을 떠다니는 도시에서 제국을 다스리는 모 소설이 생각나네요. 그런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정유미의 죽음이 말해주듯이, 성소수자 ‘교정’ 수술은 김지선 간사에게도 누구에게도 완전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김지선 간사도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좁은 세상 속에 갇혀 사는 게 어떻게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그 가짜 구원은 수술이 아니라 김지선 본인이 만들어낸 구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상’이 되면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에 수술이 받았는데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 않을까요. 본인의 정체성도, 잘못된 믿음의 좌절도 받아들이기에 너무 약했던 김지선 간사는 본인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신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구원을 전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던 것 아닐까요. 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기만 하는 세상이었다면, 김지선도 정유미도 악에 휘둘려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지 않은 채 그야말로 평범하게 살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뛰어난 소설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의도가 좋은 픽션은 아니었겠지요. 이미지 한 장으로 독자를 후드리는 외침으로는 매우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다른 글들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