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켠 작가님의 작품 속 ‘인용’과 ‘주석’의 활용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만월성하 (滿月星河) (작가: 한켠, 작품정보)
리뷰어: 한정우기, 18년 5월, 조회 320

본 글은 한켠 작가님의 [빈 방 있습니다], [루모스 경성], [만월성하],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용’ 및 ‘주석’의 활용에 관해 리뷰 한 글입니다.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 타과 수업 중 ‘드라마 콘텐츠 개발’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대학원 수업임에도 학술보다는 필드에 초점이 맞춰진 특이한 수업이였지요. 수강생들도 대다수가 창작자였습니다. 주어진 주제에 맞게 시놉시스를 작성해 발표를 하는 게 과제였는데, 프린트한 제 시놉시스를 나눠주자 그걸 본 교수님이 막 웃으며 그러시더군요.

“시놉시스에 주석을 달아왔어?”라구요.

 

그제야 알았습니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는 주석을 다는 것이 일반적인 게 아니라는 것을요.

 

‘주석’은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한다는 뜻이지요. 독자가 알 수 없는 어휘, 혹은 특정한 과거의 시대상과 관련이 있기에 현대역을 할 수 없는, 할 수는 있을 지라도 그 의미를 온전하게 전할 수 없는 어휘가 작품 속에서 사용될 경우, ‘주석’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가 있습니다.

 

다음은 [루모스 경성], [만월성하] 그리고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에서 주석을 달아놓은 표현들입니다.

“요열하게”, “낙적하여”, “졸악하여”, “조락하는가” 같은 익숙치않은 표현에서부터

“쇠당나귀”, “쇠배암”, “다방골”, “데파트걸”, “뿌르”와 같은 특정 시대와 분리해서 볼 수 없는 표현들도 있지요.

한켠님의 작품에서는 특히 명사에 관한 주석이 많습니다. 특정 역사를 기반으로 작품을 쓰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요. 특정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하여 반드시 그 시기에 사용되었던 어휘를 꼭 써야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어휘를 통해 생성해 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특히 장르가 ‘역사’이거나 ‘역사’ 그 자체를 다룬 글일 때는요.

한켠님의 작품에서는 당시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어휘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주석’을 통해 당시 사회와 오늘날의 독자 사이의 간극을 좁혀줍니다. 당시 사회의 모습과 담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지요.

저는 한켠님의 이러한 방식이 박태원의 창작기법으로 유명한 ‘고현학적 기법’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차이는 있지요. 박태원이 당시의 풍속세태를 묘사해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하였다면, 한켠님의 방식은 과거의 풍속세태를 묘사해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더 나아가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라는 모습을 보는 거니까요. 혹은 과거 사람들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구요.

 

창작이 1차적 행위라면 주석은 원전 텍스트를 ‘해석’한 2차적 행위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담았다는 [논어]만 해도 ‘주석’이 얼마나 많던가요. ‘주석’을 누가 어떻게 달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이 강조되고 텍스트 해석의 방향도 달라지지요.

반면 ‘해석’과 ‘창작’이 일치된, 작가가 1차적 행위와 2차적 행위를 모두 하였을 경우에는 작품 속 주석이 지니게 되는 결이 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만월성하]의 “가주아”를 볼까요. 여기에는 “佳酒哦, 좋은 술이야! 라는 뜻으로 돈 벌어서 좋은 술을 사 마시자는 기원을 담은 용어”라는 주석이 달렸지요.

독자가 그 ‘해석’을 수긍하고 넘어갔다면 고증을 기반으로 한 주석의 하나가 됩니다. 이것도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방식이 독자를 비판적인 관점으로 텍스트를 볼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요. 예전에 썼던 리뷰에서 ‘소외효과(혹은 생소화효과)’를 언급한 적이 있었죠. 독자는 주석만큼은 객관적일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작가가 달아놓은 주석을 보며 끊임없이 허구인 텍스트와 현실인 주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거죠. 독자의 몰입을 일부러 방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독자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과연 “가주아”라는 말이 식민시기에 실제로 쓰이던 표현인가. 허구인 것은 아닌가? 특히 시대적 고증이 탄탄한 작품일수록 그 고증을 의심하지 않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런 불확실한 표현이 하나 나오면 순식간에 모든 게 흔들립니다. (흔들린다는 것이 부정적인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환상적 사실주의로 유명한 보르헤스의 글에 꼭 한 두 개씩 가짜 주석이 들어간다 하더군요. [만월성하]에서도 “가주아”라는 표현과 여기에 달린 주석을 통해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요.

 

자 그럼, 다른 주석들을 좀 볼까요?

 

다른 텍스트를 ‘해석’해 ‘인용’하고 이를 밝힌 ‘주석’의 경우입니다.

 

[루모스 경성]에 나오는 표현 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석으로 윤동주 ‘서시’의 변형이라고 밝히지요. 아마 이 시를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다른 문학작품을 인용을 한 경우, 정확히는 텍스트가 두 개가 됩니다. 작가가 해석을 한 것은 인용된 문구이고 그 문구를 어디에 삽입하느냐가 창작이 되겠지요.

이 시구 하나가 작품 속에 인용됨으로써 우리는 이 시에 관련된 수많은 정서들을 환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서들이 작품과 결합하며 작품의 힘이 더 강해집니다.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인상이 공고할수록 더 빨리 작품에 몰입하게 되는 거죠. 또한 그 몰입을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끌고 갈지도 전적으로 작가에게 달려 있구요.

 

중국문학에서는 전고(典故)가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문학적 기교거든요. 외교 석상에서도 쓸 정도로요.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후 중국 대변인이 루쉰의 시구인 ‘어려움을 겪어도 형제 간 정은 존재한다. 상봉해서 한번 웃으면 쌓인 원한이 다 없어진다’로 표현을 했다고 하지요. 그만큼 익숙한 방식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문학 작품도 저런 표현을 사용한 게 많았어요. 특히 고전문학요. 요즘에는 많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문학작품을 인용한 건 전고 중에서도 용사(用事)라고 하는데, 주로 시구인 경우가 많지요.

한켠님의 작품 중 이 용사가 가장 두드러진다고 생각된 작품은 [빈 방 있습니다]였습니다. 배경이 역사가 아닌 현대인 글인데, 백석의 시가 정말 아름답게 인용이 되어 작품의 미를 더하고 있지요.

 

자, 그럼 문학작품이 아닌 다른 것이 인용된 것을 좀 볼까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의 “유령들이 조선을 떠돌고 있다.”는 어떠신가요. 아마 아시는 분은 아시고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겠지요. 윤동주의 ‘서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아니니까요. 이 말은 맑스와 앵겔스의 [공산당 선언]의 서두에 나오는 말입니다. 저 표현을 알지 못하더라도 주석을 통해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상하게 되지요. 이 글은 공산주의와 관련된 글이겠구나라구요. 이 말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에 나오는 첫 구절이자 첫 번째 주석입니다. 작가가 주석을 통해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지요. 독자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요.

 

전 무엇보다 한켠님의 주석을 통해 작가의 독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어떤 사료를 읽었는지, 어떤 이론에 감명을 받았는지, 어떤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아마도 제가 창작자보다는 해석자로서 작품을 접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에 그런 거겠죠. 학술적인 글을 쓸 때는 참고문헌을 밝히는 게 기본인데 창작품은 이를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해석할 때 애를 먹은 적이 많았거든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고전희곡이 전공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브릿G에 맨 처음에 올렸던 글은 주석이 하나도 없었는데요. 대신 작가의 말에 주절주절 썼었지요. 사실 제가 브릿G 내에 주석 기능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 뒤에 읽었던 작품이 한켠님의 [루모스 경성]이었답니다. 주석이 달린 걸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요! 주석 기능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창작을 할 때 주석을 써도 되는 구나라는 점을 알게 되어 정말 놀랐답니다.

한켠님 아니었으면 제가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글들은 절대 못 썼을 거에요.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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