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마법사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옛날 이야기 (작가: 별하나, 작품정보)
리뷰어: 한정우기, 18년 3월, 조회 215

‘국왕’과 ‘왕후’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혹시 남성인 ‘국왕’의 모습과 여성인 ‘왕후’의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으시나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상징계에 속하지요. 상징계는 일종의 프레임이구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인 프레임 내에서, ‘국왕’은 남성을 의미하고, ‘왕후’는 여성을 의미합니다. 상징계가 견고한 만큼, 우리도 그 언어의 틀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지요.

 

더 나아가서는 이런 생각도 하지는 않나요. 나라의 진정한 군주는 오직 ‘국왕’ 뿐이고, ‘왕후’는 국왕보다 힘이 약한 2인자라고요. ‘왕후’는 여성이기에, 나라의 통치권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라를 통치한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건 바로 ‘여왕(女王)’이지요. 엘리자베스왕이 아닌 엘리자베스여왕으로, 선덕왕이 아닌 선덕여왕으로, 그냥 ‘국왕’이라고 칭하면 될 것을 여성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마치 특수한 케이스인 것처럼 기존에 쓰이던 명사가 아닌 새로운 명사를 통해 다르게 호칭하는 거지요.

* 사실 ‘후(后)’라는 말은 원래 ‘군주(君主)’를 지칭하던 말이었습니다. 절대 왕보다 뒤(혹은 다음)에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랍니다. 갑골문에서는 ‘후’가 씨족 중 여성 지도자를 칭하는 말이라고 나와있지요.

 

[옛날 이야기]는 우리의 의식&무의식 속에 고착화된 언어의 범주를 뛰어넘는 작품입니다. “왕국의 1대 국왕은 용감하고 정의로운 여성이었다”, “국왕과 결혼한 왕후는 아름답고 도덕적인 남성이었다.” 이미 이 두 문장만으로도 우리가 가진 선입견을 무너뜨리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명사인 “여성”을 수식하는 말로는 “용감하고”와 “정의로운”이, 남성을 수식하는 말로는 “아름답고”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요.

 

“왕국의 19대 국왕은 학문을 사랑하는 남성이었다.”, “국왕과 결혼한 왕후는 예술을 사랑하는 남성이었다.”와 “왕국의 27대 국왕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국왕과 결혼한 왕후는 지혜롭고 재치 있는 여성이었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역시나 언어가 지닌 선입견을 뛰어넘는 말들이지요. 우리가 쓰는 ‘부부(夫婦)’라는 말이 가진 범주에는 ‘동성’이 포함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결혼한 동성 커플을 지칭할 수 있는 표현이 따로 없지요. 흔히 ‘동성부부’라고 부르곤 하지만, 애초에 부부라는 말 자체가 남(夫)/녀(婦)로 이루어진 조합이기에 성별이 아예 고정된 표현입니다. ‘부부’라는 말에 ‘동성’을 끼워 넣으면 이질감이 들지요. 두 어휘의 결합 자체가 모순을 일으키니까요. 우리나라도 동성결혼이 가능해진다면, 그때는 성별이 고정되지 않은 다른 어휘가 생겨나지 않을까요?

 

이건 또 다른 이야기인데요, 예전에 [꽃의 전야] 리뷰 때 아시아 최초로 대만에서 동성 결혼이  가능해졌다고 이야기를 했었지요. 이게 정확히는 법이 개정된 게 아니라 혼인 등기가 가능하도록 된 거 거든요. 대법원에서 동성 결혼을 금지한 현행법이 위헌이라고 결정이 나왔고 2년 안에 법을 바꾸라고 요구는 하였습니다. 2년 안에 법을 바꾸지 않더라도 혼인등기 자체는 가능하게 하였구요. 법률은 언어로 구성된 상징계지요. 사실 대만의 법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대만의 보수정당은 해당 법률에서 ‘남녀’라는 표현을 없애는 손 쉬운 방법을 거부한 채, 특별법을 따로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기존 법률에서 성별을 지칭하는 표현을 없애면 그만인 것을 말이지요. 마치 엘리자베스 왕이라고 부르면 될 것을 여왕이라는 표현을 따로 만드는 것처럼, 동성결혼을 기존의 결혼과는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거죠.

 

그럼 [옛날 이야기]에서 사용된 다른 어휘를 한 번 볼까요? ‘그’가 의미하는 건 뭘 까요. 우리는 보통 남성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그(He)’라는 표현을 쓰지요. 여성을 지칭할 때는 ‘그’에 ‘녀’를 더 하구요. 하지만 [옛날 이야기]에서는 “그”가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고양이이기도 하지요.

 

혹시 아직 소설을 읽지 않으셨다면 어서 가서 읽어보세요. <누구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그 자격과 인성을 검증받은 사람만이, 사람들의 뜻에 의하여 왕좌에 앉도록 한다>라는 국법에서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보시면 소름이 다 돋을 거에요. 우리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사실 ‘인간’이라는 말도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이기에 세상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옛날 이야기]는 6매에 달하는 엽편입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그만큼 강력합니다. 저는 [옛날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을 때 느꼈던 충격을 다시 느꼈답니다. 개인적으로 별하나 작가님에게 “언어의 마법사”라는 말을 했는데요. 사실 마술사라고 해야 할 지 마법사라고 해야 할 지 잠시 고민을 좀 했답니다. 근데 마법사가 맞는 것 같아요. 마술이 스킬이라면 마법은 판타지니까요.

리뷰 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일 때는 ‘ ’로, 판타지가 반영된 건 “ ”로 표기했는데요. “ ”안에 들어간 모든 어휘들이 언젠가는 ‘ ’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작가님이 들려주는 판타지가 꼭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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