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꽝스러워지는 비극 비평

대상작품: 캐럴은 라디오를 타고 (작가: 천가을, 작품정보)
리뷰어: stelo, 17년 2월, 조회 128

저는 이 작품을 블랙코미디로 읽었습니다. 제 리뷰는 독자분들 보다는 작가님이 읽어주시리라 생각하고 쓰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번 리뷰도 그렇습니다.

도입부의 아이디어는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참신하고 신선했습니다. 밀실 선물 사건! 그렇죠. 산타는 밀실인 집 안에 어떻게 들어온 걸까요. 그 범인이 밖에서 오지 않았다면… 부모님!이라는 추리는 재미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미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딱 1문단이었지만요.

문제는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딸과 아내를 잃은 아버지, 음모론적인 진상, 그리고 철학적인 딜레마에 대한 문답이 이어집니다. 결말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탐정 자신이 범인이라는 결말일까요? 육체는 죽었지만, 산타는 살아있다는 거죠.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데 음모론과 딜레마는 하필이면 ‘산타 할아버지’와 뒤섞여 버립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뱃살이 나온 할아버지요. 아이들의 행복을 외치지만 평면적이고 사악해보이는 이 캐릭터의 말이라 신뢰가 가지 않네요.

이야기는 신뢰를 잃습니다. 우스꽝스러워지죠. 코미디가 됩니다. 그래서 일단 재미가 없다는 게 첫번째 문제이고, 만약에 진지한 주제를 의도했다면 주제가 빈약하다는 게 두 번째입니다. 이 두 주장을 뒷받침해봅시다.

일단 갈등이 애매합니다. 주인공은 산타를 이미 안전하게 잡아뒀습니다. 주인공은 자기 딸에게 벌어진 사건을 설명하면서, 진상도 설명합니다. 계속 말을 합니다. 산타는 탈출을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주인공은 위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긴장감이나 서스펜스가 느껴지질 않습니다. “죽일 거면 죽일 것이지 참 말 많네”

미스터리의 입장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많은 추리 소설은 불가능한 사건을 제시해 의문을 던집니다. 독자는 궁금해지죠. 밀실은 그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탐정도 독자도 좌절하죠. 하지만 탐정은 결국 창의적으로 단서를 해석해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주인공은 진상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의 반전은 애매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을 뿐 그렇게 참신하거나 놀랍진 않습니다.

이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주제에 대한 소설로 본다면 서스펜스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딜레마말이죠.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고, 아이들을 선하게 만드는 산타가 과연 나쁜 것일까?” 이런 도덕적 질문은 긴장감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산타가 나오는 순간 이야기는 코미디가 됩니다. 진지한 주제를 다룰 수 없게 되죠.

산타에 반대하는 주인공의 유일한 이유는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딸을 잃은 남편이 복수를 결심한다는 클리셰죠.

문제는 이 클리셰가 낡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내와 딸은 평면적으로 대상화되어 있습니다. 자기 딸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딸’이라 부르는 아버지도 저는 이상하지만요. “왜 시하를 죽였어!”라고 했다면 조금이라도 이입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딸은 곰인형을 사달라고 징징거리는 아주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그 사랑스러움조차도 피상적으로 그려집니다.

딸이 자살한 이유는 하찮습니다. 낡은 곰인형을 받고 상처를 받았다는 거죠. 여기서 또 믿음을 잃습니다. 아이는 물론 상처를 받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하진 않습니다. 자살은 과장되고, 필요 이상으로 비극적인 소재입니다. 개연성이 떨어지죠. 최소한 딸의 상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했다면, 이런 코미디화는 막을 수 있었겠죠.

부인도 대상화화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딸이 죽고 식사도 못하다가 죽었다.” 그게 아내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입니다. 주인공의 동기를 위해 쓰이고 버려집니다.

산타가 나쁜 악당이라는 것 역시 클리셰입니다. 애니메이션도 있고, 소설도 많죠. 심지어 음모론적 소재의 산타도 이미 넘쳐납니다. 그 이유도 다들 비슷합니다. 아이들을 착하게 만들어 조종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 스스로도 “딸과 아내를 잃어서 복수를 결심했다” 클리셰만 남아있습니다. 결국 범인은 탐정이었던 걸까요?

 

반복하겠습니다. 이야기는 난국에 빠집니다. 대상화된 이야기에는 이입할 수가 없으니까요. 산타에게 추상적인 분노를 토로하고 산타가 뻔뻔하게 답하는 문답은 지루해집니다. 재미가 없고, 주제는 얄팍해집니다.

 

저는 왜 코미디물에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을까요? 제가 미스터리를 좋아하고, 그 윤리적 문제를 민감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미스터리물은 죽음을 다룹니다. 자살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에는 실제로 자살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한국의 자살률은 매우 높습니다. 산타가 상징하는 주제 역시 실제로 존재합니다. 사회가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잔인할 때가 많죠. 거대 음모가 아니라, 학교나 회사, 정부 하물며 인터넷 소설 커뮤니티에도 있습니다. 그 가해자 중 하나가 나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 주제가 희화화 되어 있습니다. 코미디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대상화하고 있습니다. 주제를 안 다루면 모르겠는데 기어코 둘을 섞어 놓으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택할 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이론에 기반해 추리를 해볼까요? 프로파일러 서종한 씨가 쓴 [심리부검]에 따르면…

자살하는 사람들은 상당 수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트랜스 젠더나 다문화 가정 자녀처럼 사회적 소수자인 경우도 많습니다. 혐오와 멸시를 당하고 배제를 당합니다. 누구도 인정해주고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절망적인 실패를 겪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직장을 잃거나, 중요한 시험에 연이어 떨어지거나, 소중한 사람에게 버림 받는 식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상당 수는 자살하기 전에 이미 우울증을 겪지만, 대부분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보호자나 배우자는 치료를 거부하거나, 방해하기도 합니다. 선입견 때문에 말이죠.

이러한 정황 근거로 추리해봅시다. 주인공은 딸과 아내를 고립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힘들어해도 도와주지 않고, 무시하고, 방치했을 겁니다. 그리고 거대 조직과 시스템을 비난하다가, 스스로가 산타 =시스템의 일부라는 걸 깨닫습니다. 탐정이 범인인 결말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더 큰 죄를 가리려는 트릭이었던 겁니다.

 

사실 이 작품이 특별히 잘못을 하고 있진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클리셰입니다.

많은 작품들이 죽음을 희화화하거나 단순화 합니다. 영웅인 주인공들은 비현실적인 편견에 기초해 만들어진 잔혹한 범죄자들을 패거나, 사회를 고발한다며 음모론을 만듭니다. 선악이 불분명함을 표방하는 작품들은 클리셰 캐릭터들이 철학책을 읽긴 했는지 의심스러운 딜레마를 가져와서 “아 정말 어려운 문제야.”하고 고민을 늘어놓고 이상한 결론을 냅니다. 심지어 소설뿐만 아니라 뉴스나 다큐까지 그렇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오래된 전통이죠. 타인의 고통은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로만 남습니다.  이 전통적인 클리셰를 답습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혼자 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려고 노력해왔으니까요. 단편에서 장편에 이르기까지요.

제 결론은 사회파 소설을 쓰시라는 게 아닙니다. 통속적인 사회파 소설들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는 하니까요. 사회파도 한 방법이지만,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영미권의 작가들은 사실적인 범죄 소설을 통해서 진부한 대상화를 피해갑니다. 대표적으로 대실해밋이 그려내는 세계는 잔혹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끔찍한 세계는 당시 미국의 현실을 일부나마 담고 있었죠.

일본의 몇몇 본격파 작가들은, 과거보다 세련되게 인물의 동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게임이 되어버린 추리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작품이지만 [인사이트 밀]이 생각나네요.

일상 미스터리 작가들 역시 그 일을 해냈지요. 시체가 없으면 이야기가 재미 없다는 건 편견일 뿐만 아니라, 직무 유기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클리셰로는 사람 5만명을 죽여도 독자는 지루해합니다. 많은 소설들은 비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훌륭하게 서스펜스를 만들고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일상 미스터리들은 사소한 수수께끼를 넘어서 일상의 사건들에 담긴 악의들을 드러내고, 훌륭한 인물 묘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2년 연속으로 3개의 상을 석권한 추리작가 요네자와 호노부 역시 일상 미스터리 작가로 시작했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처음으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의 밀실은 흥미로운 아이디어입니다. 좀 더 고민했더라면 참신한 다른 소재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간단한 예로 부모님이 아이에게 말하는 겁니다. “이 집은 밀실이 아니었어. 산타가 들어올 방법이 있는 걸” 자신의 범행?을 숨기려는 부모님과 아이의 추리 싸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건 제가 대충 만든 예시일 뿐입니다. 저는 어쩌면 인터넷에서 본 소설 하나에 지나치게 진지하게, 작가님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이 평을 받아들이실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지는 작가님의 선택입니다. 앞으로의 작품으로 어떤 놀라운 답을 보여주실지 기대하겠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