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울함 가득한 리뷰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비극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원시의 바다에서 처음 탄생한 생명이 서로를 구분하는 막을 만들어서 여기까지가 ‘나’이고 저기부터는 ‘너’라고 정의를 내렸을 때부터 이런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서로의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우리는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상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제대로 동작하려면 두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관찰되는 대상은 완전히 진실된 반응만을 보여야 하며, 관찰자는 그 반응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로 인해 의사소통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만약 상대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상대의 안에 무엇이 있다고 가정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이 사실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텅 빈 존재이고, 마치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고 가정해도 나는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반증할 방법이 없다.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없는 말은 곧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의사소통을 할 이유도, 목적도 사라져버린다.
마찬가지로 나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내가 지금 하는 생각,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나의 안에 있는 ‘나’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나의 안에 ‘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정교하게 나를 속이고 있는 다른 존재에 의한 것인지, 또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해할 수도, 알 수 없는 무언가로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이렇게 나의 안에서 있을 자리 또한 잃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경계를 뚫고 그 안으로 물리적으로 침입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소설의 ‘나’가 나이프로 손목을 그은 건 자신의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직접 측정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텅 빈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날을 타고 더운 피가 뚝뚝 떨어진다면 ‘나’는 나의 안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논의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대되는 결과를 얻는다. 나는 살점의 틈을 헤집어보아도 피가 흐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렇게 ‘나’는 ‘나’ 안에서 ‘나’를 찾는 것을 실패하고 만다. 직접 스스로에게 한 실험을 통하여 ‘나’는 텅 빈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나’는 다음 단계의 논리로는 넘어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 또한 자신처럼 피가 흐르지 않는 인간이며, 절박한 심정으로 연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을 증명할 방법을 ‘나’는 알고 있지만, 그러한 실험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프로 상대방을 찔렀을 때 피가 흐르지 않았을 때 올 허무함을 ‘나’는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나’는 상대의 안, 다른 사람들의 안에는 자신 안에는 없는 것이 있다고 근거 없이 이야기한다. 방법이 명확하고, 결과가 명백하며, 모든 준비가 끝난 실험이 있는데도 ‘나’는 이를 행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논리를 빙빙 돌리며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깨뜨리지 않을 다른 증명법을 찾는다. ‘나’는 상대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증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나’ 또한 이를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사실은 텅 빈 존재들이고 세상의 모든 사랑은 그저 의미 없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해서 오는 허무함을 느끼는 것보다는 ‘나’에게는 더 견딜 만 한 일인 모양이다.
결국 ‘나’는 실험의 필요성을 없애서 이러한 논의로부터 벗어나기로 결정한다. ‘나’는 사람들이 사는 땅의 끝, 바다로 떠남으로써 자신이 믿는 세상을 지키려고 한다.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자신이 혼자인 이유를 하나 더 댈 수 있을 것이다. 서툰 한국어와 서툰 일본어로 이루어지는 역무원과의 의사소통이 불완전한 이유 또한 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