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노인들의 아우슈비츠… 브릿G 추천

대상작품: 국립존엄보장센터 (작가: 모르타, 작품정보)
리뷰어: 후더닛, 9월 30일, 조회 60

 ‘국립존엄보장센터 디스토피아 장르에 속합니다. 정말 암울한 미래가 펼쳐집니다. 국가가 주도하여 사람들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켜버리니까요. 대상은 생존세나 사망세를 없는 노인입니다. 단순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아니면 오래 살았으면서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에 내야만 하는 생존세와 사망세. 그러나 가난하고 자신을 부양할 가족 또한 없어 세금을 내지 못하는 노인들은 체납 독촉을 받고도 끝내 내게 되었을 가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그건 자진해서 낸다는 의사를 밝히고국립존엄보장센터 들어가거나 아니면 끝까지 암말 안하고 버티다 센터에 질질 끌려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가지 하나입니다. 다른 없습니다. 단순하게 말해, 늙어서 없으면국립존엄보장센터직행인 것입니다. 그것도 거기서 죽기 위해서 말이죠.

 이런 암울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무엇을 그렇게 부를 있을까요? 정말 아무리 고령화 사회가 되어도 그렇지, 돈이 없으면 그냥 죽어야 한다니 제가 대상이 것도 아닌데 절로 슬퍼지네요.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어쩌고 했던 신경림 시인의 시마저 떠오를 지경입니다

 , 사담은 이쯤에서 관두고, 지금이라도 리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할게요.

 소설은 그렇게 스스로 센터로 들어간 할머니의 하루를 담담히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라고 것은 센터에 들어가자마자 이름이 박탈되고 오직 704호라고만 호명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운다는 것은 인간성을 지운다는 뜻이기도 하죠. ‘국립존엄센터 입소와 동시에 사망자로 처리하는 같습니다.

선조들은 사람이 죽은 영혼이 되어 7일 동안 속세에 머문다고 믿었습니다. 704 할머니도 실은 그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할머니가 죽음을 기다리며 센터에 머무는 30시간이 유령이 되어 머무는 7일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죠

 그렇게 유령처럼 센터와 사람들 사이를 배회하면서(적어도 제겐 그렇게 보이더군요.) 할머니는 죽음에 저항하는 사람, 얼마 남지 않는 삶의 순간에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절규하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은 죽음에 대해 이제 초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마음 편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편에는 죽음에 대한 겸허한 수용이 자리잡아 서로 갈등하는 가운데 죽음은 할머니에게로 착실하게 다가옵니다.

 저는 처음에 소설을 디스토피아 장르로 여기고 읽었기에 국립존엄보장센터 뭔가 음모 같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그렇게 전개가 이뤄지니까요. 이를테며 마이클 베이가 감독하고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한 영화아일랜드처럼 말이죠. 다들 낙원으로 알았지만 실은 장기 척출을 위한 죽음의 섬이었던 것처럼국립존엄보장센터 그런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없는 노인들이 끌려온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909 노인, 전형준씨가 그런 뉘앙스의 말을 흘리기도 했고 말이죠. 전형준씨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이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나 보다 여겼었는데, 소설은 자극적인 방법으로 그런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은연 중에 그런 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합니다.

 , 과연 음모는 있었습니다. 센터의 이름도 그렇고 센터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센터의 홍보 문구도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국립존엄보장센터 말하지만 사실 거기엔 어떤 존엄도 없다는 것입니다. 말이 존엄이지 센터란 기실 가진 돈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있는 사회에서 더이상 자본이 없기에 쓸모 또한 없게 잉여 존재들을 그냥 재빨리 처분하기 위한 곳입니다.

한 마디로 돈 없는 노인들의 아우슈비츠인 것입니다. 나치에게 유태인이 그런 의미였고 그런 유태인들을 재빨리 그리고 대량으로 처리하기 위한 곳이 아우슈비츠 였듯이, 소설 속 ‘국립존엄보정센터’ 역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편의 시설이 잘 되어있고 질 좋은 식사를 준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편의시설이나 음식은 사형수가 죽기 전에 받게 되는 최후의 만찬과 똑같은 것일 뿐입니다. 존엄이 보장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살해되기 위해, 더이상 방해하지 못하도록 처분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센터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저 처분 기계가 준비되기까지의 시간에 불과한 것이죠.

작품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아마도 그러한 센터의 진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주인공 할머니는 마지막에 그런 선택을 하는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너네들이 정한 대로 하지는 않겠다 것으로 저항한 것이죠.

 고령화 사회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자, 이미 우리나라보다 고령화 사회가 일본도 그렇고 노인을 대상으로 비극적 비전의 작품들이 최근 더러 나오는 같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소네 케이스케의 ‘열대야’였는데요. 2009 나온 단편은 더없이 불길하고 암울한 일본 노인의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죽지 않고 오래 살아 자신들의 인생을 망친다면서 노인을 닥치는 대로 린치하고 살육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질 뿐만 아니라 노인들의 묻지마 투표로 인해 점점 우익화 되는 경향을 반영하여 일본이 다시 전쟁 가능 국가가 되어 다른 나라와 교전을 하는데 노인들을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징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일본 노인들에겐 우리나라 남자들의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꿈만큼이나 얼른 깨고 싶은 악몽인 이야기이죠. 그런 면에서 소네 케이스케의열대야 앞뒤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투표하는 노인세대에 대한 준엄한 경고인 셈입니다. ‘당신들이 제대로 투표하지 않으면 결국 희생되는 당신 자신일 !’ 하고 말이죠.

 어쩌면 소설도 그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요? 어제도 문재인 정부와 정당 지지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오직 가진 돈으로 자신의 쓸모가 증명되는 사회를 너무나 원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을 지지하는 연령층이 주로 50 이상이더군요. 그들의 선택이 정말 제대로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그들의 우려가 정녕 그들의 삶에 이로운 것인가 따져보고 지지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지지하다가는 오직 소네 케이스케의열대야국립존엄보장센터 미래만이 기다릴 뿐이라는 것을 얼른 깨달았으면 좋겠네요.

 미래는 현재 선택한 것이 차곡차곡 쌓여 형성되는 결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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