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토르가 누군지 아십니까.
모르신다구요…
그럼 아킬레우스는 아십니까. 네 아신다구요. 그 아킬레스 건의 이름의 유래가 된 영웅 아니냐구요. 네 맞습니다.
헥토르는 그 아킬레우스에게 죽임당한, 일리아드에 나오는 영웅이자 트로이의 왕자입니다. 보통 ‘빛나는 투구의 헥토르’ 로 불리죠.
그보다는… ‘아킬레우스에게 창으로 목을 꿰뚫려 죽은 뒤, 시체가 전차에 매달려 끌려다닌 사람’이라고 하면 ‘아아, 걔…’ 라고 떠올리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 소설은 바로 그 ‘헥토르’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그 ‘헥토르’가 죽은 뒤, 현대사회, 그것도 미국에 태어났다면? 이라는 가정으로요.
(귀찮아서 이하 말투는 평소 리뷰식… 쫌쫌따리 써둔 리뷰라 새로 고치기엔…;;)
‘환생물’이라고 하면 보통 주인공은 상당한 메리트를 갖고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통 이런 설정은 전생의 지식과 능력을 무기 삼아 새로운 세계를 손쉽게 정복하는 서사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헥토르에게 환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시, 더 참혹하게 잃는다. 아니,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눈을 뜬 곳은 저승이 아니라, 1980년대 텍사스의 아기 침대 위였다. 그것도 이미 서른을 넘긴, 아내와 아이까지 있던 일리오스의 왕위계승자가, 카산드라의 오빠가, 반신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일기토를 벌이던 장군이, 갓난아기의 몸으로.
이 소설의 첫 번째 농담이자 첫 번째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본인은 정말 심각하게 죽고 싶어 하지만, 독자는 자꾸만 웃음이 난다는 것. 다행인지 초반만 그러하다…
1. 냥줍당한 30대 유부남
헥토르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하데스(저승)에 왔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낯선 언어, 낯선 얼굴들, 그리고 자신을 “막내아들”로 여기며 옷을 벗기고 씻기려 드는 여인 앞에서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문제는 그가 이미 아내가 있고 자식도 있는 몸이라는 점이다. 왕자로서의 존엄, 신성한 서약, 일리오스 최고 사내의 체면… 이 모든 것이 목욕물 한 번에 무너진다. 본인이야 수치심에 죽고 싶어하지만, 읽는 사람은 웃겨 죽고 싶….
이 장면 이후 소설은 아주 노골적으로 하나의 정서를 밀어붙인다. 바로 “울음”이다.
헥토르는 1부 내내 운다. 소리 내어 울지는 않지만(그는 이 부분에 자존심을 건다), 조금만 감정이 격해져도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마치 갑자기 냥줍당해 “여기가 어디냐아아아옹…” 하며 밤새 우는 새끼고양이처럼. 다만 그 고양이의 정신연령은 서른 몇 살이고, 죽기 직전까지 전쟁터에 있다가 창에 목이 꿰뚫려 죽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초반의 이 낙차 — 유아의 몸과 전사의 자의식 사이의 참을 수 없는 간극 — 야말로 이 소설이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코미디이자 비극의 원천이다. 웃긴데 슬프고, 참담해서 더 웃긴다.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이 비극.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2. 폐허가 된 고향, 그리고 진짜 절망의 시작
「갇힌 영혼」에서 헥토르는 결국 하데스의 강을 찾겠다며 한밤중에 집을 뛰쳐나가고, 어이없게도 유괴범에게 붙잡힌다. 경찰에 구조된 후, 자신을 부르며(헥토르-!) 울부짖는 나탈리의 품에서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그녀의 심장 소리가 겹쳐 뛰는 것을 듣는다. 그제야 깨닫는다. ‘여기는 하데스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여긴 어디인가. 우연인지 현생의 몸, 아기의 이름도 헥토르(헥터)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흔한 ‘환생물’의 문법을 배신하기 시작한다. 진짜 절망은 유괴 사건이 아니라, 나탈리가 읽어주는 트로이 전쟁 동화책에서 온다. 큰형 데니즈가 보여준 트로이 유적 사진 — 무너진 성벽, 아무도 없는 폐허, 풀만 무성한 신전의 흔적 — 앞에서 헥토르는 자신이 죽은 지 3천 년이나 지난 미래에, 그것도 대서양 너머 미국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건 SF적 설정 공개같은 게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에 사망 선고를 내리는 장면이다. 고향도, 가족도, 문명 전체가 이제는 신화이자 각주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게 아니라, 돌아갈 곳이라는 개념 자체가 삭제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언젠가 그 폐허의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1부 거의 끝에 나오지만 열심히 돈도 모은다… 지독한 향수병이란 이런 것이다. 대상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병.
그 이후로는 사실상 어린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과 완전히 동일하다. 온갖 처음 보는 것들을 만져보고 건드려보다가 하루가 지나고, ‘아버지’ 타메르가 면도기로 면도하는 걸 신기하게 쳐다보고, 시도때도 없이 졸려서 잠들거나, 조금이라도 감정이 격해지면 눈물을 펑펑 쏟는다. 아직 아기니까(…).
그 와중에 이 집 사람들에게 받은 것을 보답해야 덜 불편할 것 같아 그 작은 몸으로 집안일을 도우려고까지 한다. 아이고 이 아저씨야…..;; 아이고 왕자님아…………
3. 에미르라는 구원, 그리고 그 구원조차 두려운 아이
「그리고 산은 노래했다」부터 이 소설은 확실히 궤도에 오른다. 헥토르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는 공간은 할아버지 에미르의 목공방이다.
거대한 체구에 메마른 눈을 가진 할아버지 ‘에미르’는 가족 안에서 스스로 고립되어 있으며, 헥토르는 이상하게도 그의 곁에서만 안정감을 느낀다. 에미르의 방에서 아름다운 여인(그의 죽은 아내 아일린)의 초상화를 발견하며, 그녀가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에 기묘함을 느끼게 된다.
시간은 조금 더 흘러 이제 헥토르도 학교를 다닌다. 학교라는 제도도, 그 많은 아이들도, 미친듯이 질문을 쏟아내는 아이들도, 선생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냥 받아들이로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에미르의 공방으로 향할 정도.
에미르는 말(馬)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혐오하는데 이는 그의 숨겨진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어느 밤, 헥토르는 악몽을 꾼 에미르가 고통을 참지 못해 결국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을 목격하고 필사적으로 그를 막아선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서로의 슬픔을 알아보는 존재”가 된다.
이 소설이 정말 잘하는 것은 잔잔한 일상 묘사다. 중간중간 헥토르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일상에 대한 묘사가 담담하면서도 굉장히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올 때 봤던 하늘은 어제와 다름없이 흐렸고, 구름이 좀 더 많아져 있었다.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꽃향기, 참나무와 잔디의 뿌리 사이로 흐르는 물의 희미한 비린내가 진한 흙냄새와 뒤섞였다.
이런 문장들은 향과 습기와 빛까지 살아있는 것처럼 그려내면서도, 그 아래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슬픔을 깔아둔다. 실제로 정말 자주 터진다.
이불 냄새가 좋아서 얼굴을 파묻었다가, 그 모습을 형들에게 들켜 “나는 아이가 아니다”를 되뇌며 도망치듯 뛰어들어가는 장면 같은 것.
나는 눈을 감은 채 이불 속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깨끗한 냄새였다. 마치 갓난아기가 되어 누군가의 품에 폭 안겨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중략)
나는 불현듯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가, 문을 지나 정원을 지나는 길목에 선 채 나를 쳐다보고 있던 데니즈, 에네스와 마주했다. 순간 얼굴이 불타오르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에네스는 놀란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고, 데니즈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남은 이불들을 걷어 바구니에 쑤셔넣고는 집 안으로 달음박질쳤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치 아이처럼 굴고 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걸 자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온몸을 뒤덮었다. 한편으로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나는 목공용 앞치마를 한 채 거실을 나서던 에미르와 부딪쳤다. 바구니와 함께 이불이 바닥을 굴렀다. 내가 바구니를 세우고 다시 이불을 넣는 동안 에미르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 어린 사자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끓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나무껍질 같은 손이 내 뺨을 감쌌고, 다른 손이 내 등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는 내가 울 때면 늘 그렇게 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숨을 고르기도 전에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울고 싶지 않았다.
울어서 해결되는 게 있었다면 천 번이라도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몸은 여전히 나보다 강했고, 이번에도 보란 듯이 나를 배신했다. 나는 볼썽사나운 흐느낌을 삼키며 눈앞의 노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울지 마 이 아저씨야ㅠㅠ! 라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정작 그를 울게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것들 — 이불 냄새, 별, 눈물짓는 노인의 손 — 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잔인함이다.
그래도 「그리고 산은 노래했다」까지는 잔잔한 편이다(…). 뭐 가끔 정말로 죽으려고 시도를 하긴 하지만…; 어린애라 당연히 너무나 쉽게 실패한다.
목재를 구하기 위해 에미르가 헥토르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한다. 아버지 타메르는 자신도 가겠다고 우기고, 결국 셋이 함께 여행을 가게 된다. 거기에서 별을 보고, 여러 사람들을 보고, 에미르의 말 트라우마를 목격한다.
물론 헥토르는 이 여행을 가서도 결국 또 일리오스로 가고 싶다고 혼자 조용히 울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고향에서 죽고싶다는. 그만 울어 이 아저씨야 으헝헝헝헝 거기 이제 없다고ㅠㅠㅠㅠ!!!!!!!
그리고 카산드라와 일리오네, 여동생들과 트로이아 시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계속 교차서술되며 독자의 눈물도 쏟게 만든다.
제일 눈물났던 부분들.
이 삶은 내게 내려진 저주였다.
나는 에미르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짐승처럼 울었다.
다시는,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얼굴조차,
그림자 한 번 보는 것조차 내게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신들께 용서를 빌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전부 다 잘못했다고 무릎을 끓고 손에 수없이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토록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줄은 몰랐노라고, 그게 그렇게 큰 죄인 줄은 몰랐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뭐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4화)
“네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는지, 이렇게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
“하지만 제발, 너를 이리 괴롭히지 마라.”
“네가 사랑하는 이들이, 너를 사랑하는 이들이 고통을 받는단다. 그들을 조금만 가엾게 여겨 다오. 나를 보아서라도 그렇게 해줄 수 없겠느냐…”
나는 노인의 애원에 흐느꼈다.
“하지만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아무것도 줄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아득히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누구도 내가 왜 이 낯선 곳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어두운 방에서, 이불 속에서 무릎을 끓은 채 수천 번도 더 물었다. 매 순간 내게 대답을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그저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조심스레 내 눈가를 쓸었다.
“너는 내게 이미 많은 것을 주었단다.”
“……!”
내가 고개를 들자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쌌다.
“네가 나를 구하지 않았느냐.”
“……”
“죽으려던 나를 구했고, 내게 다가와 주었고, 내 곁에 있어주었고, 내게 차를 가져다 주었고, 내 말을 들어주었고,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지 않으냐.”
나는 여전히 눈물이 어려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이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화롯불처럼 따스하게 웃었다.
“어린 사자야, 너는 내 눈의 빛이다.”
“……”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무엇도 너를 대신할 수 없다. 너를 위해서라면 이 늙어빠진 목숨따위 몇 번이라도 버릴 수 있다.”
그는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노인은 내 눈물을 닦아주며 그저 온화하게 웃기만 했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알아주려무나. 너는 내게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약속하마, 작은 태양아.”
에미르는 나를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하듯 깊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너를 용서할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언제든 네 곁에 있을 것이다.”
(24화)
그리고 에미르의 마지막 대사는, 이 소설 1부 전체의 정서적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약속은 나중에 에미르가 죽고 난 뒤에도 헥토르를 이 세상에 붙들어 매는 끈이 된다(2부).
여행에서 돌아와, 헥토르는 에미르의 공방에서 “For Hektor”라고 새겨진 상자 안 정교한 말 조각들을 발견한다. 말을 극도로 혐오하던(처음부터 싫어한 건 아니었다 하더라도) 에미르가 몰래 그를 위해 말 조각들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에 헥토르는 눈물을 흘리며, 그 안에서 처음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깊은 애정을 느낀다.
4. 무가치한 명예, 혹은 명예의 무가치함
「무가치한 명예」에서 헥토르는 반 아이들의 텃세에 초연하다. 9년을 전쟁터에서 구르다 죽은 사람에게 도시락 냄새 놀림 따위가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학교에서 아이들 무리가 그를 괴롭히며 폭행하자, 헥토르는 처음엔 순순히 맞다가 결국 상대를 가차없이 제압해 기절시킨다. 다친 얼굴을 본 에미르가 헥토르와 에네스를 불러 “왜 맞고만 있었느냐”고 다그치며, “누군가가 너희를 짓밟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마라. 네 삶은 온전히 너의 것이다.“라는 강렬한 말을 남긴다.
이는 신들의 뜻에 종속된 삶만을 알던 헥토르에게 낯선 충격을 안긴다. 이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내 운명은 온전히 내 것이다”라는 ‘불경한’ 생각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놀라 참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를 뒤흔드는 것은 사소한 질문이다. ‘엄마’ 나탈리는 생일에 뭘 가지고 싶냐고 다시 물어보지만 헥토르는 생일을 챙긴다는 개념도 어색할 뿐더러… 그가 정녕 원하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트로이아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지독한 향수병.
이 화의 클라이맥스는 홍수 속 구조 장면이다. 폭우로 인해 하교하던 스쿨버스가 발이 묶이고, 학생 몇 명이 다리 아래 강물에서 놀다 돌아오지 않은 것을 눈치챈 헥토르가 홀로 뛰어가 아이들을 구해낸다. 그러나 아이들을 구한 직후, 헥토르 자신이 급류에 휩쓸린다.
익사 직전의 순간, 트로이아 최후의 날 가족들의 절규와 아내 안드로마케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이번에야말로 죽어서 쉬고 싶다”고 체념하려는 찰나, 에미르가 직접 급류에 뛰어드는 걸 발견한다. 구조된 직후 헥토르는 감사가 아니라 격렬한 분노를 터뜨리다 실신한다. 그것도 영어가 아니라 트로이아의 말로.
≪당신에겐 명예도, 수치도 없는가?!!≫
≪아둔하고 정신나간 늙은이, 나는 당신이 여기서 가장 지혜롭고 강인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쏟아지는 빗물에 당신의 넋과 현명함도 같이 빠져나갔단 말인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빌어먹을, 당신의 가족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안중에도 없나!!? 그런 것도 잊을 만큼 노새처럼 늙어버린 게 대단한 자랑이라도 된단 말인가!?≫
≪왜,≫ “왜……!!”
늙고 병든 몸으로, 아무것도 아닌 ‘가짜 손자’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에 헥토르는 오히려 무너진다.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며 자란 그가, 정작 자신을 위해 명예도 목숨도 거는 사람 앞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
동시에 트로이아 시절 아이사코스와의 회상을 통해, 그가 왜 그토록 “명예”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명예가 결국 도시도 가족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무가치한 명예”)의 비극적 배경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건 2부에서 더 끔찍하고 상세한 진실로 헥토르에게 돌아옵니다… 애가 반 실성해서 쓰러짐…)
5. 나의 태양 — 마침내 터지는 눈물의 진짜 이유
「나의 태양」은 1부의 정서적 정점이다. 홍수 사건 후 “작은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이 불편하기만 한 헥토르 앞에, 발가락을 잃고도 담담한 에미르가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는다. 헥토르가 태어났을 때 그 눈에서 자신의 죽은 아내, “태양”이라 부르던 아일린의 흔적을 보았다는 것. 그를 위로하고 싶었고, 그가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이 말.
“작은 태양아, 너는 내게 어떤 증명도 할 필요가 없다.”
늘 신들에게, 왕국에게, 타인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고, 보답하고, 명예로 값을 치러야 한다고 믿어온 헥토르에게 이 말은 거의 폭력적일 만큼 낯설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결국 무너져 그의 품에 안겨 운다. 또 운다 이 아저씨 으엉엉엉ㅠㅠㅠ
이어 에미르는 신분과 민족의 벽을 넘어 자신을 따라와 준 아일린과의 이야기, 그녀의 죽음, 그리고 “너무도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녀가 사랑스러운 만큼 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는 생존자의 죄책감을 고백한다. 헥토르가 왜 유독 이 노인 곁에서만 편안함을 느꼈는지, 그 답이 여기서 완전히 드러난다. 둘은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도 살아남았다는, 그리고 그 살아남음 자체가 죄스럽다는 병.
그리고 에미르는 죽는다. 그의 아버지의 낡은 시계를 물려주며,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는 네가 선택할 수 있다”는 말과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태양, 네 시간을 살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헥토르는 이제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아는 트로이아의 노래를 불러주며 그를 떠나보낸다.
에미르가 죽을 것임을 직감한 헥토르는 격하게 흐느끼며 기도를 한다. 헥토르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일린에게까지 매달려 애원하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처절하다.
신도 아닌 망자에게 애걸하며 나는 울었다. 엉망진창에 매끄러움이라고는 없는 말들뿐이었다. 당당한 전사이자 왕자였던 자가 아니라,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이곳에 와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매달렸다. 에미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의 영혼이 그에게 다가온다면, 에미르는 주저없이 나를 버리고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 역시 그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래 기다렸다. 줄곧 홀로 에미르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뻔뻔하게도 그녀에게 탄원하고 있었다. 생전에 그녀는 몹시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쩌면 그 관대함으로 내 말을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생각으로. 나는 온 마음으로 그녀에게 애원했다.
한때 신들에게조차 당당히 맹세를 하던 ‘빛나는 투구의 헥토르’가, 이제는 알지도 못하는 망자에게 아이처럼 매달려 제발 할아버지를 살려달라며 애걸한다. 이 낙차야말로 이 소설이 그리는 성장(혹은 붕괴)의 진짜 모습이다.
6. 돌아오지 않는 것들 — 웃음기가 걷힌 자리
1부 마지막에서 헥토르는 겉으로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축구, 육상, 수영으로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데, 이는 슬픔을 지우기 위한 오래된 습관 — 전장에서 감정을 억누르던 방식 그대로다. 그러다 홍수 사고가 있었던 다리를 지나던 중, 갑자기 목이 찢기는 듯한 환상통(생전 창에 목을 꿰뚫려 죽었던 기억)에 무너진다. 정작 본인은 그 순간 죽었기에, 왜 그런 통증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이를 목격한 에네스가 그를 붙잡자, 헥토르는 “나는 안 죽어… 그럴 수가 없어”라고 답한다. 에미르가 죽기 전 아일린에게 한 맹세 — 남은 가족을 지키겠다는 약속 — 때문이다. 처음의 절박한 유쾌함(?), 냥줍당한 새끼고양이 같던 헥토르는 이제 없다. 남은 것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된, 산 채로 망령이 되어버린 한 존재뿐이다.
7. 상실의 이중 구조
1부를 관통하는 핵심 감정은 ‘향수병’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헥토르는 두 겹의 상실을 동시에 짊어진다. 첫째는 물리적 상실이다. 왕자에서 무력한 갓난아기로, 신들과 대화하던 전사에서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이방인으로. 그의 몸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다. “이건 내 몸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소설은 신체의 무력함을 통해 정체성의 붕괴를 매우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둘째는 시간적 상실이다. 데니즈가 보여준 신화책과 트로이 유적 사진 앞에서 헥토르가 느끼는 절망은, 단순히 “고향에 못 돌아간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가 아는 모든 것—가족, 도시, 언어, 신앙, 심지어 전쟁의 고통마저—이 이미 ‘역사’와 ‘전설’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그가 그리워할 대상 자체를 소급하여 지워버린다. 폐허가 된 트로이의 사진을 보며 그가 느끼는 감정은 향수(鄕愁)라기보다 존재론적 공포에 가깝다. 이 부분에서 소설은 단순한 ‘이세계 전이물’을 넘어, 시간과 기억, 그리고 상실을 다루는 진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8. 문화 충돌을 그리는 방식
이 소설이 특히 인상적인 지점은 문화 충돌을 다루는 방식이다. 신분제의 소멸, 여성의 지위, 종교(다신교 대 유일신교), 아동에 대한 태도(너무 감싸고 도는 것 같은 것, 공교육 등), 인종차별, 생일이라는 ‘기이한’ 풍습 등, 헥토르의 시선을 통과한 현대 미국 사회는 낯설고 때로는 불경스러운 곳으로 재구성된다.
이 장치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다시 낯설게 만든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제 가장 친한 친구예요”라는 아이의 말 앞에서 헥토르가 느끼는 당혹감—신을 두려움 없이 대하는 태도에 대한 근원적인 이질감—은 신과 인간의 관계, 운명과 자유의지라는 이 소설의 서브 주제를 건드린다.
이 소설 1부는 시작은 우습고 끝은 참담하다. 그 사이에서 독자는 3000년 전의 영웅이 이불 냄새에 눈물짓고, 목욕물 속에서 수치심에 몸부림치고, 조각칼을 쥔 손으로 죽은 말들의 형상을 새기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 소설의 진짜 재능은, 그 우스꽝스러움과 처절함을 같은 문장 안에 아무렇지 않게 병치시킨다는 데 있다. 헥토르가 겪는 것은 단순한 향수병이 아니라, 사랑했던 모든 것이 폐허와 신화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살아남은 자의 형벌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형벌 속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그 구원은 명예도, 증명도, 보답도 아닌, 그저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말 한마디로 온다는 것.
1부의 마지막에서 헥토르는 여전히 울지 못하는 아이로 남아 있지만, 독자는 이미 안다. 그 눈물은 언젠가, (2부에서) 걷잡을 수 없이 터지고야 말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