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눈비는 내리고: 유머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의뢰(비평)

대상작품: 잠 못 드는 밤 눈비는 내리고 (작가: 초모완, 작품정보)
리뷰어: 창궁, 4시간 전, 조회 16

*리뷰 의뢰를 받아 작성하므로 기존 리뷰 형식(선 요약 후 구조 분석)과 다르게 진행합니다.

*유머에 관한 내용은 제 개인적인 지론임을 밝힙니다. 따로 공부하거나 배운 적은 없습니다.

 


 

0. 유머에 대하여

유머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우리가 무엇을 유머로 느끼고 인식하는 걸까요? 왜 어떤 사람은 아재개그에도 웃고, 어떤 사람은 블랙코미디쯤은 가야 웃을까요? 왜 같은 상황을 다뤄도 이것은 리얼리즘이고, 저것은 코미디가 될 수 있을까요? 개그콘서트의 코너와 짧은 단막극 사이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모든 아이러니는 유머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꿔말하면, 모든 유머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의 형태는 다양하죠. 몸의 모순(슬랩스틱), 말의 모순(아재개그, 만담), 상황의 모순(희극 구성) 등등이 있죠. 그런즉 유머를 다루고자 한다면 아이러니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를 다루는 건 사실 소설 자체가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아이러니를 단순히 다룬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이러니가 어떤 식으로 유머로서 작동하는지도 알아야죠.

아이러니는 3단계를 거쳐서 유머로 승화됩니다.

첫째, 아이러니의 설정

둘째, 아이러니의 인식(노출)

셋째, 아이러니를 향한 공격

따라서 작가의 유머 코드는 첫 단계인 ‘유머로서 어떤 아이러니를 설정하느냐’와 마지막 단계인 ‘인지된 아이러니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가 언급되지 않는 까닭은 대개 유머의 작동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는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아이러니를 인식시킬 것인가’가 곧 ‘어떻게 웃길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인식과 공격 사이에 지연을 유도해서 ‘긴장(모순)이 해소되는 지점’을 유머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아이러니의 설정은 곧 ‘작가가 어떤 아이러니를 유머로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반대로 ‘작가는 어떤 아이러니를 유머로 인식하는 걸 피하는가?’이기도 하고요. 아주 쉽게 생각해서 ‘비꼬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비꼬기는 대상의 아이러니를 아이러니를 내포한 말로 공격하여 대상의 아이러니를 더욱 부각시키는 기법입니다. 그 비꼬기에 동감한다면 웃기겠죠. 하지만 동감하지 못하면 불쾌하게 다가옵니다.

블랙코미디는 이러한 ‘민감한 아이러니’들을 강도 높게 꼬집고 공격하는 것이며, 아재개그는 반대로 지극히 사소한 언어의 아이러니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인 인식과 공격은 일본 만담인 ‘만자이’의 보케와 츳코미를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만자이는 보케의 헛소리를 츳코미가 정정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즉, 보케가 헛소리를 통해 아이러니를 유발하면, 츳코미가 그걸 지적함으로써 유머가 촉발되는 식입니다. 관객은 보케가 헛소리를 할 때부터 인식할 수 있고, 츳코미가 지적하고 나서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소설로 전환해 일반화시켜 표현하자면, ‘아이러니’를 작중에 텍스트로 배치시키고, 그것을 텍스트로 지적하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물론 독자가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시점 자체를 공격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엔 독자가 인식할 수밖에 없도록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의 크기를 키워야겠죠.(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무성 영화이기에 누구도 지적하지 않지만, 우리는 찰리 채플린의 과장되고 희극적인 동작을 통해서 아이러니를 인식하고 웃습니다)

 

또한 유머는 한 번 공격하는 것으로 소비되는 단발성 유머도 있지만,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를 증폭시키거나 이어나갈 수 있다면 해당 유머는 장기화됩니다. 소설에서 ‘갈등’을 단 번에 해소하지 않고 텍스트와 서사를 거쳐서 천천히 해소하듯, 유머 역시 마찬가지로 아이러니를 단번에 해소하지 않고 꾸준히 공격함으로써 웃음을 길게 유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머에는 ‘처음 봤을 때 웃긴 것’과 ‘꾸준히 웃긴 것’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반복될수록 유머로서 힘을 잃고 유머로 작동하지 않습니다.(사실 후자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전자에 비하면 내구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이는 아이러니를 자극 받는 지점(피격 부위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이 ‘인식 자체’에 있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해하면 웃긴’ 유머죠. 인식의 전환 자체가 아이러니의 인식과 공격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한 번 전환된 의식을 손바닥 뒤집듯 돌리는 게 아닌 한 또 웃기긴 쉽지 않습니다.

바꿔말하면 ‘꾸준히 웃긴 유머’는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해하지 않아도 웃긴’ 유머인 셈이죠. 직관적인 슬랩스틱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바보 캐릭터, 개그 캐릭터처럼 같은 아이러니(이는 앞서 언급한 ‘인식의 전환’을 유머로 삼은 아이러니 역시 포함합니다)라도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 공격 방식, 공격 시점 등의 변주를 통해 꾸준히 웃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웃기는지’의 여부와 별개로 유머를 다루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작가가 유머로 삼을 아이러니를 설정하고, 그걸 작품 속 텍스트로 배치하며, 그게 작중에 작동되게끔 하면 유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지, 얼마나 강도 높게 공격하는지에 따라 유머의 강도 역시 결정되겠죠. 또한 이 유머가 실제로 작동해서 독자를 웃기는 여부는 독자의 아이러니 인식 범주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기도 한 만큼, 상당히 난감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특히 유머는 ‘혼자 웃는’ 것을 금기시하는 만큼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기법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은 지적할 수 있겠죠. 서론이 엄청 길었는데, 본 작품이 코미디라고 하신 만큼 제 유머에 대한 지론을 먼저 밝히고 이에 기반해서 작품을 리뷰함을 알립니다.

 

1. ‘현실’이라는 중력

일단 솔직히 말해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딱 한 번 웃고, 딱 한 번 피식했습니다. 전자는 소변 얘기할 때, 후자는 비둘기 잡을 때요. 바꿔말하면 그때를 제외하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 소설이 순문학인 건 아닌지, 장르소설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워했었습니다. 결국 이름 때문에 코미디일 가능성을 제일 높게 보긴 했으나, 작가님께 직접 물어 답을 듣기 전까지는 쉽게 긍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이 소설이 ‘너무 리얼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극한 상황에서조차 리얼하기’ 때문입니다. 본 작품은 게임 회사의 사이 나쁜 사업부의 설이브(여), 운영팀의 고지마(남), 개발팀의 진가맥(남), QA팀의 마이어(남)가 회사 건물 옥상에 갇혀 엄동설한 속에 같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적 배경을 깔고 갑니다.

인물들 이름부터가 너무 비현실적이고, 이들의 인물성은 다소 전형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초반의 회의실 장면은 굳이 게임 회사가 아니어도 직장에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지 모르겠습니다.(저는 경험이 없어 모르지만, 이와 비슷한 게임 개발 사례가 있어 익숙하게 읽긴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서로 틈만 나면 뒷담 까기 바쁜 앙숙들이며, 서로에게 책임 회피만 하다가 옥상에 갇혀버렸죠.

즉, 이 소설의 가장 핵심이 되는 아이러니는 사이 나쁜 인간들이 서로 협력해야 하는 상황적 모순에서 촉발되는 아이러니입니다.

나머지 아이러니는 이 핵심 줄기에서 뻗어나오거나 붙어있는 곁다리들이죠. 그렇기에 본 작품이 주력해야 할 건 사이가 나쁘지만 협력해야 하는 장면을 통해서 그들의 말(서로를 적대)과 행동(서로에게 협력)을 교차시킴으로써 아이러니를 공격하고, 유머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이 코미디로 실패한 이유가 나옵니다.

작중 인물들이 너무 현실적으로만 움직입니다. 끝까지 니탓내탓 하다가, 정말 정말 춥고 배고파져서야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고, 그러자 보상처럼 극적으로 구조되어 네 사람은 개과천선했다는 결말…… 곧 상투적인 결말입니다. 물론 모든 코미디가 결말까지 아이러니를 자극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 내내 아이러니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결말까지 아이러니하지 않고 상투적이라면 그건 문제가 되겠죠.

둘 중 하나여야 했습니다. 상황적 모순이 갖춰진 순간부터 구조되는 그 때까지 아이러니를 공격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어야 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극적으로 화해하고 하나가 되어서 구조되었는데 돌아가자마자 ‘원상복구’가 됨으로써 서사 자체를 전복시켰어야 합니다. 물론 후자는 코미디로 인식하기 애매해지는 지점이 있긴 하지만요.(왜냐면 결말 하나만 믿고 달리기엔 리얼리즘 분량이 너무 깁니다)

네 사람은 회의실에서도 남탓하고 지적질하고 폭로하며 싸우고, 옥상에 올라가서도 똑같이 굴고, 옥상에 갇히고 나서도 똑같이 굽니다. 협력이랄 것도 없는 진가맥의 원맨쇼였고, 인물들은 과장되게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딱 현실에 있을 법하게만 굽니다. 더도덜도 말고, 딱 그 정도로만요. 누군가 이 이야기를 요약해서 듣는다면 코미디로 인식하기보다는 극한 상황에 노출돼 극적으로 회심한 네 사람의 인생 전환기 정도로 이해할지 모릅니다.

서술 역시 끊임없이 네 사람(특히 고지마, 제일 덜한 건 설이브)의 속물적인 심리를 다루며 환경적 어려움(추위)만 다루고 있지, 아이러니를 공격할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제가 웃었던 소변 파트는 고미자의 손이 차가운 금속에 붙은 상황에서 소변으로 해결하자니까 같은 남자인 진가맥과 마이어가 자기는 쐈다며 설이브를 본 것입니다. 설이브는 미쳤냐고 하고 이 의견은 기각되죠.

이 부분이 웃겼던 이유는 소변으로 녹인다는 ‘나름의’ 합리적인 발상의 종착지가 ‘남자의 손을 여자 소변으로 녹인다’는 성 윤리의 아이러니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진짜로 설이브의 소변으로 녹이는 장면이 들어간다면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쾌하게 여길 사람도 있었겠죠?

이 외엔 작중 내내 인신공격에 업무 지적만 반복되며 실은 설이브가 모두를 감싸줬다는 감동적인 반전까지 더해집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옥상에 갇힌 극한 상황에 밀어넣어졌는데, 다들 너무 현실적이고 진지하게 접근하기만 합니다. 마치 한 치의 농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이 상황 자체를 유머로 인식하는 건 어떨가요? 작중에서 직접 공격하지 않지만, 독자가 이것을 아이러니로 인식하면 유머로 기능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정말로 힘들더군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들 너무 현실적이니까요. 본 작품은 재난물에 가깝지, 코미디가 아니니까요. 그나마 지속적인 아이러니로 작동하는 ‘비현실적인 이름’조차 작품이 구성하는 ‘현실성’이라는 중력 안에 삼켜지고 맙니다.

그 현실성이란 중력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말까지 이르게 되면, ‘그래서 왜 옥상문이 잠겼는지’까지 생각하게 되죠. 회의실에 폰을 반납하고 잠깐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갇혀서 구조 요청을 못한 핍진성을 챙긴 치밀함이, 정작 옥상문이 잠긴 이유에 대해선 끝까지 밝히지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옥상문이 잠긴 원인만 결말에 다뤄도 ‘아이러니’를 적극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옥상에 갇혔던 네 사람은 전부 개과천선해서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옥상문이 잠긴 일에 대한 책임은 시설정비과에게 돌아가 거기 안에서 또 폭탄 돌리기가 진행된다는 말을 덧붙였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그럼 그들도 옥상에, 아니 이번엔 지하주차장에 갇혀봐야 개과천선할 수 있을 테니까요.

 

2. 희극적이기 위해서

사실 이 소설의 구조와 전개를 볼 때 기시감이 든 게 사실입니다. 정확히는 이 소설이 추구하고자 한 아이러니와 유머에 대해 모범적인 사례를 읽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바로 박부용 작가님의 ‘온도계의 수은’입니다. 이곳에서도 각자의 책임 소지가 있는 위기 상황에서 서로에게 책임 돌리고 폭탄 돌리며 남탓하고 니가 하네 내가 하네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말은 개과천선이 아니긴 하지만요.(과학소재 단편소설 대상작이기도 합니다. 꼭 읽어보시는 걸 강권합니다)

이곳의 인물들은 희극적입니다. 자기가 중요한 인력이니 귀찮은 책임은 질 수 없다고 어필하고 서로의 치부를 공격하며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로서 작동합니다. 그리고 국면 전환이 일어나고, 이때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싹 닫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 한 번 웃기고요.

단순히 유머를 다루는 게 아닌, 유머 자체가 메인이 되는 코미디라면 인물들이 ‘현실’에 묶여 있어선 안 됩니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세요. 일상이 ‘선천적 얼간이들’이나 ‘마음의 소리’인 사람은 좀체 없습니다. 일상이 개콘 ‘달인’이나 ‘봉숭아학당’인 사람 역시 좀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상을 지닌 사람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을 평범하게 다루면…… 그건 아이러니가 아니라 그냥 다큐멘터리일 뿐입니다.

코미디는 무엇보다 이러한 리얼리티를 적극적으로 벗어던지고 탈피하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여태 희극적이다가 이상한 데서 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아이러니로 작동되는, 곧 리얼리티조차 아이러니의 도구로 써먹는 장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님께선 유머를 다루는 감각이 아예 없다고 보진 않습니다. 소변 파트나 비둘기 잡을 때 원딜 드립 친 걸 보면요. 또한 작품 내내 구현된 리얼리티의 수준을 보면 이걸 조금만 비틀어도 유머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 현실의 벽에 얽매이시면 안 됩니다. 웃기기 위해선, 과감해져야 하고 망가져야 합니다.

아이러니를 ‘공격’해야 합니다. 귀중하게 다룰 게 아니라요. 유머는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피어납니다.

이 리뷰가 작가님께 좋은 연구의 동기로 작용하길 바랍니다. 잘 읽었습니다.

 

p.s. 사족이지만 작명은 몰입방지용인 듯하나(이것이 리얼리즘이 아닌 코미디임을 주지시키기 위한), 그렇게 쓴다면 곽잡아(꽉 잡아) 안남겨 남탁해(탓해) 도먹어(또 먹어) 등등이 더 확실하게 코미디로거 기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미디는 유치해도 돼요. 웃길 수만 있다면!

p.s.2. 쓰고 나니 작품 외적으로 웃긴 게 하나 있습니다. 제목은 잠 못 드는다는데 작중에선 잘만 자더군요. 이것도 포함하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웃었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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