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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생이 보는 법정물 (널널한 작품 괜히 엄격하게 보기) 감상

대상작품: [리트리버 연작] – 회수 – 06. 휴정,다음은…. (작가: 아침은삼겹살, 작품정보)
리뷰어: VVY, 2시간 전, 조회 3

아침은삼겹살 작가님께서 제 판결문 형태의 소설을 읽어주시고 재밌는 제안을 주셨습니다.

당신께서도 법정물을 쓰신 적이 있는데, 작중 헌법재판소의 시선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리뷰를 의뢰하시더군요.

시험기간을 지나 이제야 약속을 지킵니다.

다만 제가 공법은 약해서 판결문 스타일로는 못 썼습니다만.. 실제 법조인이 따지는 쟁점 위주로 현장을 바라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이 소설 자체는 엄밀한 법정물이 아니고, AI가 예산청장을 맡는 시대를 상상한 코미디입니다.

그냥 재미로 고증 따지는 리뷰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사건을 설명하면,

기획재정부와 국가예산시뮬레이션청(이하 ‘예산청’으로 부름)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예산 편성은 기획재정부 권한입니다. 예산청은 그동안 예산최적화 계산안을 기획재정부에 제출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권한을 자기가 받아서 자기 이름으로 직접 수행하겠다는 겁니다.

예산청이 헌법재판소(헌재)에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한 거죠.

권한쟁의란 국가기관 간 권한 행사에 관한 다툼이 있을 때, 헌재가 법률을 해석하여 상호 권한 범위를 정해주는 소송입니다.

 

권한쟁의심판의 당사자 요건을 보겠습니다.

당사자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 한합니다. 사안에서 지자체는 문제되지 않으니 국가기관이어야겠군요.

사건의 청구인은 예산청, 피청구인은 기획재정부입니다.

그리고 증인으로 기획재정부장관이 소환된 상황이죠…

그런데 잠깐, 정부조직인 청과 부가 그 이름으로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있을까요?

권한쟁의심판의 당사자는 헌법 또는 법률에 의하여 부여받은 ‘권한’의 주체여야 합니다. 자신의 권한 범위를 다투는 소송이니 당연하겠죠.

그런데 기획재정부는 자기 이름으로 독자적인 권한을 가진 독립된 주체가 아닙니다. 많은 법률을 보면, 기획재정부 표시를 달고 서명해야 하는 처분이나 결재 등은 ‘기획재정부장관’ 이름으로 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장관 개인이 모든 서류에 일일이 직접 도장을 찍는 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부하 직원들이 장관 이름으로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형태이죠. 즉 그들 업무 권한의 주체는 ‘기획재정부장관’입니다.

사안의 예산청의 경우 작가님이 창작하신 부서입니다만, 우리나라 법제상 행정 구조는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사건의 청구인은 예산청장, 피청구인은 기획재정부장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획재정부장관은 사건의 당사자가 되니까, 증인으로 소환되는 것도 불가하겠죠.

민동기 장관은 사건의 당사자로서 진술했어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권한쟁의심판의 사건 요건을 보겠습니다.

권한쟁의심판을 받으려면 피청구인의 행위에 ‘처분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처분성이란? ‘그 행위 자체로 청구인의 법적 지위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기획재정부가 행하는 모든 활동에 시비를 걸 수는 없죠? 기획재정부장관 이름으로 청사 간판을 올렸는데, 이를 본 시민들이 맘에 안 든다고 다 행정소송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시민들에게 법적으로 영향을 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장관 이름으로 걸린 그 간판 때문에 원래 있던 자기 간판이 가려진 사람은 소송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재산권 행사에 대한 침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권한쟁의심판으로 할 소송은 아닙니다만.) 이것이 처분성의 개념입니다. 당사자에게 법적으로 영향을 주는가 아닌가.

특히나 권한쟁의심판의 경우, 그 처분이 청구인에 대한 ‘권한 침해’로 인정되어야 하겠죠.

그러면 사안을 볼까요? 기획재정부가 자기 법적 권한에 근거해 예산을 편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산최적화 계산안을 예산청에 의뢰합니다. 그러나 결과 발표는 자기 이름으로 합니다.

이 행위에 처분성이 인정될 수 있을까요?

언뜻 보면 예산청의 업무를 기재부가 법적으로 통제하고 공인하고 있으니까, 예산청에 대한 처분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예산청이 가진 법적 지위의 침해가 있는 걸까요?

아마 정답은 아니오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산청이 현재 법제상 계산안을 마련하는 행위 이상의 법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을 테고,

따라서 예산청에게 그 이상 예산 편성에 관해 인정되는 지위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침해받을 법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예산청으로서는 청구인이 되어 다툴 권한도 없습니다.

또한 보충적인 쟁점입니다만, 참고할 만한 우리나라 판례에 따르면, 대개 행정부 조직 내 권한 분쟁은 원칙적으로 내부 위계 질서로 해결할 수 있으므로, 권한쟁의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번 소송은 사실 기초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서, 각하되어야 할 것이죠!

 

위의 이야기는 형식적인 청구 요건에 관한 검토입니다.

조금 따분할 수 있죠.

그게 현실입니다만.

그러나 현실에 갇힐 필요 없이, 우리는 소설 속 본안에 대해서도 한 번 검토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안의 본안은 이것입니다: “기획재정부는 AI 사업에 한하여, 예산청에 예산편성권을 넘겨라.”

“왜냐? 지금껏 예산편성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해 왔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증거로, 지난 10년 간, 기획재정부는 예산청이 제출한 계산안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의회에 제출해 왔다.”

“그만하면 이게 사실상 우리 업무가 아니고 뭐냐? 우리 이름으로 계산하고 책임도 우리가 지겠다.”

이러한 청구가 사법부에서 인정될 수 있을까요?

위에서 헌법소송/행정소송적 관점을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소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썼습니다만.

소설적 허용으로 사안을 민사소송적 관점에서 본다면요. 청구인 변호인이 굉장히 좋은 공격 포인트를 잡은 겁니다.

우리나라 민사소송은 ‘합리적인 기존 상태의 유지’를 추구합니다. 이를테면 손해배상도 징벌적 과배상이 없고 딱 원상회복될 정도만큼의 액수만 인정함이 원칙이죠. 다른 예로, 설령 임대인이 임대차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서 임차인이 계약 기간 만료 후에도 어쩔 수 없이 눌러앉아 살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면 기존 임대차 상태가 유지되는 것으로 보고, 임차인은 매월 기존 계약상 월세를 임대인에게 꼬박꼬박 지급해야 합니다. 본인이 짐싸서 나가고 방을 비워주지 않는 한에는요. (법원은 그 목적물에 살고 있는 행위 자체를 임차인의 이익으로 보고, 그 소유주 임대인과의 이익관계를 조정해야 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보증금 못 돌려받았다고 그 사정이 바뀌었다 보지도 않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껏 예산청이 실질적인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그것이 10년 간 의회에 그대로 제출될 만큼 기재부의 의미 있는 통제나 조정이 없었던 경우, 민사적으로는, 예산청이 해당 업무의 실질적 권리의무 귀속의 대상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보상이나 책임도, 예산청의 이름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변호인의 논리는 꽤 타당해 보입니다. (첨언하건대, 현실에서는 이런 국가기관 간 권한 분쟁이 민사소송으로 다뤄질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소설적으로는, 이건 꽤 말이 되는 공방이었던 것이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주셔서 한 번 휘갈겨 써 봤습니다.

본작이 포함된 리트리버 연작은 부담 없는 분량의 SF 엽편들인데요. 내용상 연결점이 없는 에피소드물이라 본작만 보셔도 무방합니다. 예외로 본작과 연결된 외전이 한 편 있는데 재밌더군요.

작가님 작품은 현실적인 관료제나 프로세스, 인물의 억양 따위 묘사, 그럴듯한 고유명사 창조와 같은 디테일이 참 좋습니다. 본작도 뜻밖에 신청인 측의 주신문 – 피신청인 측의 반대신문 – 재주신문으로 이어지는 증인신문 절차가 고증이 잘 지켜졌더군요. 이러한 현실적인 요소에서 더욱 뻗어나가는 상상력이 제 취향입니다. 일례로 No Issues라고 띄우는 재판장 모니터 같은 창작은 정말 있어도 그럴 법하고 재밌겠더라구요.

제 작품을 늘 읽어주시는 건에 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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