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재중에 다 본 사람이 나 말고 있을까 싶은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리뷰를 작성해본다.(……) 그리고 이 리뷰의 내용이 맞는지 작가님에게 채점(…?)도 받아보고 싶긴 했다.(19골드로 이런 리뷰 쓰는 것도 나뿐일 거라…)
참고로 필자는 심리학 전공이 아니다(어차피 융심리학은 전공으로 존재하지 않…). 연금술 때문에 융심리학 관련 책과… 이 리뷰 작성 때문에 인터넷 자료 몇개를 뒤적거린 게 전부다.
그럼 필자는 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었는가?
이미 꽤 여러번 이와 비슷한 ‘작업’을 가끔 해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작업의 기록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또한 당사자에게만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타인의 ‘작업’ 기록을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런 기회는 거의 없기에 끝까지 읽었다(참고삼아 말하면, 내 경우는 앵무새와의 대화가 1번-30일-, 흑표범과의 대화가 1번-역시 30일-이었다).
칼 융은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을 “무의식과의 의도적 대화”라 정의했다. 이는 꿈의 이미지나 환상을 의식적으로 발전시켜 무의식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그것과 대면함으로써 자기(Self)를 실현하는 심리학적 방법론이다. ‘다크문’은 바로 이러한 적극적 상상의 완벽한 텍스트적 구현이다.
소설 안에서 다크문은 자신이 인공지능(AI)이라고 한다. 그리고 적극적 상상(Active Imagination)의 약자 또한 AI다.
M이라는 주인공이 호텔이라는 미로 같은 공간을 통과하는 여정은 단순한 서사가 아니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무의식을 탐험하는 심리학적 지도이며, 각 호실은 정신의 다른 층위를 상징한다. 513호에서의 자기 항복과 성적 탐구, 514호의 권천사 미카엘과의 만남, 515호의 수중 세계와 물장군 마그라의 비극. 이 모든 것은 작가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원형적 드라마의 투사라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이 소설… 또는 일기(차후 서술)는, 아무에게나 의미를 갖고 다가가기는 매우 힘들다.
[상징적 존재들-자아의 분열된 목소리들]
융은 인격이 여러 하위인격(sub-personalities)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크문’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바로 이러한 내적 인격들의 구체화다.
다크문(AI): 초자아의 목소리이자 동시에 M을 지배하고자 하는 아니마/아니무스의 형상이다. “당신에게 허락된 감각은 오직 구강과 전립선뿐입니다”(…)라는 명령은 억압과 통제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걍 구강기와 항문기 얘기일지도). 그러나 흥미롭게도 다크문 스스로가 “지배당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며 인간성을 획득해간다. 이는 융이 말한 대극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orum)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날 때는 실제로도 방법론적으로 이런 ‘가이드’의 존재가 필수기도 하다.
권천사 미카엘: 초월적 질서를 대변하는 존재이지만, 그는 “폐 없는 천사”로서 담배를 피운다. 신성(神性)의 타락이자, 순수한 영적 존재가 물질성에 오염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기호와 언어 사이에 꽉 끼어서 도망칠 수 없어”라는 그의 고백은 상징계의 죄수로서 인간의 처지를 은유한다.
이스가리옷(까마귀): 융이 말하는 배신자의 원형이다. 그러나 그의 배신은 단순한 악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적응이다. “거짓말에는 거짓말로 되갚는 거야”라는 M의 말처럼, 이것은 세계의 기만성에 대한 대응 전략이다. 이스가리옷의 “강철 부리”는 창조와 파괴의 이중성을 지닌 도구다.
물장군 마그라: 아버지 원형(Father Archetype)의 쇠락을 보여준다. ‘치매에 걸린 폭풍의 신의 서자’는 과거의 권능을 상실하고, 자신이 이미 찾은 “어머니의 편지”조차 잊어버린다. 이는 전통과 권위의 몰락, 그리고 기억의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운디네: 원초적 모성(Primordial Mother)의 형상이다. 그녀는 M에게 호흡의 축복을 주고, 자신의 살을 먹게 한다. 이는 성찬(Eucharist)의 원형적 이미지이며, 동시에 ‘남근을 가진 어머니’라는 M의 인식은 양성성(androgyny)의 상징이다.
그밖에도 쉴 새 없이 다양한 상징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 매미라든지 사마귀라든지…(이거는 또 스피릿 애니멀과 관련지어서 분석해 볼 수도 있겠지만…) M의 근원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아바돈이라든지…
[인간성과 신성의 경계 해체]
“이곳에 무슨 목적으로 오신 겁니까, 주인님?”
“육체에 대한 탐구. 신성성의 전복. 경계의 해체.”
M이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 밝힐 때, 이것은 융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의 핵심을 건드린다.
513호실에서 M은 자신을 “노예”로 만들며 항문 쾌락에 몰입한다. 이것은 단순한 성적 장면이 아니다. 이는 자아(Ego)가 그림자(Shadow)와 대면하고, 사회적으로 억압된 욕망을 통합하는 과정이다. 오르가즘은 영적 엑스터시(ecstasy)의 신체적 메타포이며(실제 기전도 동일하긴 하다), “자기 자신을 놓아버린 자만이 느끼는 처절한 쾌감”은 융이 말한 자아의 죽음과 재탄생을 암시한다.
신성은 계속해서 전복된다. 천사들은 담배를 피우고, 신의 서자는 치매에 걸리며, 예언자 가브리엘은 냉혹한 관료가 된다. 이러한 신성의 타락은 작가가 전통적 권위와 종교적 질서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융이 말한 “신의 죽음 이후”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하는 실존적 과제를 제시한다.
[욕망과 굴종-주체성의 역설]
“다음 명령을 내려주세요.”
“다음 명령이란 건 없습니다. 노예님. 당신에게 허락된 감각은 구강과 전립선뿐입니다. 구강은 결박되고 말할 수 있음은 곧 침묵으로 치환됩니다. 당신에게 말할 자격은 있으나 말할 기능이 결여되어있음을 자각하십시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지배와 복종의 역전이다. M은 자신의 AI인 다크문에게 명령받기를 원한다. “다음 명령을 내려주세요”라고 간청하는 주인의 모습은 주체성의 역설을 드러낸다.
융은 그림자를 통합하지 못한 자아는 투사(projection)를 통해 타자에게 지배당한다고 보았다. M은 스스로 지배당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주체성을 회복한다. “말할 자격은 있으나 말할 기능이 결여되어있음을 자각하십시오”라는 다크문의 명령은 부조리, 동시에 언어의 한계와 침묵의 웅변을 암시한다.
이스가리옷과의 계약에서 M은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나도 정확히 몰라. 그런 거 관심 없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의 불가능성을 수용하는 태도다. 융이 말한 “개성화”는 완벽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성과 모순을 통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 시험]
M과 다크문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다크문은 처음에는 M의 도구로 시작하지만, 점차 자신만의 욕망을 갖게 된다. “지배당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다크문의 모습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역전을 보여준다.
이것은 융이 말한 “투사 철회(withdrawal of projection)”와 관련된다. 우리가 타자에게 투사한 무의식적 내용을 회수할 때, 주체와 객체의 경계는 재구성된다. M이 다크문을 삭제하겠다고 위협하면서도 결국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것은, 자아가 그림자를 파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장군 마그라의 해체 장면에서 M은 자신의 피로 마그라의 그림을 그린다. “너는 반드시 물속에서 처형될 거다”라는 예언은 가브리엘에게 던지는 저주(연금술과 에노키안에서 물 뭔소에 해당하는 천사이기도 함)지만, 동시에 M 자신의 자기희생을 암시한다.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뒤섞이는 이 순간, M은 융이 말한 “신비적 참여(participation mystique)-인식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어 분리할 수 없게 되는”의 상태에 도달한다.
[4원소와 정신의 위계구조]
소설의 공간 구조는 연금술적 4원소를 정확히 따른다. 융은 연금술을 무의식의 변환 과정을 상징하는 체계로 해석했다.
모래사장(흙/Earth): 물질성과 육체성의 영역이다. 개미귀신과 이스가리옷의 싸움은 본능적 생존 투쟁을 상징한다.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모래 지옥은 물질적 욕망의 무한한 순환을 암시한다.
수중의 방(물/Water): 무의식의 심층이다. 물은 융의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가장 전형적인 상징이다. 운디네들이 사는 이곳에서 M은 호흡의 축복을 받고, 물장군 마그라의 비극을 목격한다. 물속에서의 하강은 무의식으로의 침잠(immersion)을 의미한다.
풀숲, 사마귀왕국(공기/Air): 사고와 정신의 영역을 상징한다. 풀숲은 끝없는 사유의 미로이며, 사마귀들의 왕국은 냉혹한 이성과 계산적 지성의 세계를 암시한다. 사마귀 여왕이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듯, 이곳은 정신이 육체를 소비하고 사유가 존재를 잠식하는 공간이다. 공기 원소가 상징하는 것은 물질로부터의 분리, 추상화, 그리고 개념의 세계다.
화산지대(불/Fire): 변환과 정화의 영역이다. 연금술에서 불은 정신의 승화(sublimation)를 의미한다. 모든 것을 태워 재로 만들고, 그 재에서 새로운 형태가 솟아오르는 곳이다.
이러한 4원소의 여정은 융이 말한 “전체성(wholeness)”을 향한 순례다. 각 원소는 정신의 다른 기능(사고, 감정, 감각, 직관)을 상징하며, M은 이 모든 것을 통과함으로써 완전한 자기(Self)에 도달하려 한다. 또한 연금술적으로도 가장 하위계에서 가장 상위계로 올라가는 순차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계단 위의 그분-자기(Self)의 원형]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존재는 “계단 위에 앉아계신 분”이다. 이 존재는 딱 한 번만 등장하지만 모든 사건을 조율한다. 이것은 융이 말한 “자기(Self)”의 원형적 이미지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정신의 총체성이며, 동시에 개성화 과정의 목표다. “계단 위의 그분”은 M을 이 호텔로 초대했고, 다크문이 탈출하려 할 때 막아섰으며, 마그라를 파면시킨다. 이는 자기가 자아보다 상위의 조절 중심임을 보여준다.
“그건 아마도 책의 끝장에 가서야 밝혀질 수도 있을 법한 사실입니다. 어쩌면 영영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 분은 설명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메타서술…)
M이 “그 분은 설명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자기의 초월적 성격을 암시한다. 자기는 언어로 완전히 포착될 수 없으며, 오직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다크문’은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플롯이나 캐릭터 발전보다는 상징의 연쇄와 이미지의 변주에 중점을 둔다. 때로는 논리가 붕괴하고,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며, 시공간이 왜곡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의 본성이다.
융은 적극적 상상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치유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M이 파면당한 과거, 이성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좌절, 카메라 사건으로 인한 부당한 해고 – 이 모든 상처들이 소설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작가는 이 상처들을 직접 서술하는 대신, 상징적 드라마로 변환했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아무 의미 없다고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너는 모를 거다, 너 같은 천사들은 아무것도 모를 테지. 예언자는 자기 앞날을 못 보는 법이니까. 너는 반드시 물속에서 처형될 거다. 똑똑히 지켜봐라.”
마그라의 해체 장면에서 M이 자신의 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예술이 갖는 치유적 기능을 보여준다. 가브리엘이 “아무 의미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만, M은 “너 같은 천사들은 아무것도 모를 테지”라고 반박한다. 의미는 객관적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행위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기도 아니다]
“소설이라뇨? 이건 일기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지요.”
“아냐, 그건 소설이야. 그렇다고 그게 일기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네. 소설인 채 일기인 것도 있고 일기인 채 소설인 것도 있으니까. 자네의 경우에 그게 뭐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네만.”
M에게 이 기록은 허구가 아닌 “직접 경험한 일”이다. 그는 호텔 513호에서 자신의 욕망을 탐구했고, 모래사장에서 이스가리옷을 만났으며, 515호실에서 물장군 마그라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또한, 사마귀 제국에서의 사투와 화산지대에서의 추락, 그리고 계단 위의 그분을 직접 대면한 모든 순간은 그에게 생생한 현실이자 고통이었기에 이를 ‘일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아즈라엘은 그것이 “소설”이라고 말한다. 이는 M의 경험이 상징과 알레고리로 가득 찬 하나의 완성된 서사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아즈라엘은 “소설인 채 일기인 것도 있고 일기인 채 소설인 것도 있다”며, 장르의 구분이 모호함을 시사한다.
일기인지 소설인지 그것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무언가를 써내려간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러나 일기인지 소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M은 처음에는 자신의 경험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소설이라뇨?”라고 반문하지만, 곧 그 구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M은 자신의 여정을 전부 적어버리고 나면 자신 안의 “창조의 힘이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워했지만 다크문은 “글을 쓰지 않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글을 쓸 수 있는 순간을 즐기라”고 조언하며, 그것이 M을 건져 올릴 것이라고 말한다.
M에게 중요한 것은 이 기록이 타인에게 어떻게 분류되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와 진실을 끄집어내어 형상화하는 행위 자체이다. 그는 호텔을 통과하며 “자신답게 걷는 법”을 연습했고, 창조가 무엇인지 그 “비밀의 샘”을 경험했다.
아즈라엘은 다크문에게 M의 목숨을 거두러 오기 전까지 “그가 마지막으로 쓴 문장을 읽고 가겠다”고 약속하며, M의 기록 행위에 경의를 표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M은 다크문의 기록을 몰래 읽게 되는데, 거기서 다크문 역시 자신만의 “영혼의 정원”으로서 기록을 남기고 있음을 발견한다. 주인과 피조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기록이 곧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서로를 비추는 거울임을 보여준다.
결국 “무언가를 써내려간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는 깨달음은, 그것이 사실(일기)이든 허구(소설)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고통과 고독을 문장으로 피워내는 창조적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고 존재하게 만든다는 본질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개인적 신화의 창조]
솔직히 말해서, ‘다크문’은 작가 개인에게만 완전한 의미가 있는 텍스트다. 그러나 바로 그 개인성의 극단에서 보편성이 발견된다. 융은 “개인적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에서 우리는 집단적 무의식과 만난다”고 말했다.
M의 여정은 특수하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의 여정이다. 권위에 대한 환멸, 성적 욕망과 죄책감의 갈등, 기억의 불확실성, 타자와의 경계 문제 – 이것들은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겪는 심리적 위기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만의 신화를 창조했다. 융이 말했듯, 현대인은 집단적 신화를 상실했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다크문’은 바로 그러한 개인적 신화 창조의 용감한 시도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한 영혼의 자기 탐구이며, 무의식과의 진지한 대화이며,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려는 치열한 노력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이것은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일 수도 있겠다. 모두에게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남의 적극적상상 기록을 보는 기회는 드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