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의 역설’에 담은 작가의 비원(悲願)은?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안녕, 아킬레우스 (작가: 해도연, 작품정보)
리뷰어: 후더닛, 17년 8월, 조회 93

<글의 중반부터 스포일러 있습니다.>

‘브릿G’에 닻을 내린 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다 눈 앞에 놓은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주로 커뮤니티에 있는 ‘독자 추천 작품’을 길잡이 삼아 하나씩 읽어나가는 참입니다. 그러다 타임리프 공모전 본심에 오른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보게 되었고 ‘제논의 역설’에서 따온 제목이 제 눈길을 사로잡아 이 작품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정말로 ‘제논의 역설’을 주요한 모티브로 하고 있더군요. 일단 타임 루퍼가 운영하는 가게 이름부터 ‘러닝 터틀’ 입니다. 아킬레우스를 따라잡으려 부지런히 달리는 거북이를 뜻하는 것이죠. 여기에 피터란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타임 루프를 일으키는 장본인인 타임 루퍼를 찾아 그가 타임 루프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거나 설득되지 않을 경우 그 능력을 없앨 수 있는 자입니다. 타임 루퍼는 자신이 만든 루프 안에서만큼은 신이나 다름 없습니다. 남들은 똑같은 시간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자기 의지로 변화도 못 일으키지만 타임 루퍼만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자기 의지로 변화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그토록 강한 존재이지만, 피터 같은 자에 비하면 약한 존재입니다.

피터는 타인이 만든 루프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임 루퍼와 똑같이 그게 루프의 세계란 것을 인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지로 변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루프 능력까지 소멸시켜 버릴 수 있지요. 피터는 그렇게 거북이인 타임 루퍼 보다 앞서서 달리는 자, 아킬레우스 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품 마지막에서 한 타임 루퍼가 피터를 두고 아킬레우스라 부르기도 하지요.

아마도 피터란 이름은 유명한 토끼 피터 래빗에서 따온 게 아닐까 합니다. 거북이 하면 제논의 역설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인데다 그 이야기 역시 거북이가 토끼를 열심히 따라잡는 것이니까요. 결국 거북이가 토끼를 추월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전개와 꽤 닮아있기도 하죠. 그러니 피터가 토끼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피터 래빗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까 하네요.

총평하자면 꽤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름대로 반전까지 충실히 준비되어 있어서 더욱 몰입해서 읽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전 이 작품을 두 번 읽었습니다. 작품이 마련한 반전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죠.

일단 여기서 경고 메세지를 남겨 둡니다.

다음에선 이 작품의 반전이 노출되기 때문에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서 읽기를 멈춰주세요.

 

먼저 이상하게 여겼던 부분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바로 피터가 원래 타임 루퍼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타임 루퍼가 아니고 피터와 똑같이 시간이 많이 두터워지는 바람에 인식이 있는 상태에서 루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 자라는 게 밝혀지는 부분입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좀 허술하게 읽었는지 요 부분, 타임 루퍼 외에 시간의 두께를 볼 수 있는 자도 있다는 것을 놓쳤어요. 그래서 타임 루퍼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루프의 세계를 인식하면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의아했어요. 두 번 읽으면서 알고 보니 그는 단지 시간의 두께를 볼 수 있는 자이더군요.

그러다 작가가 처음부터 여기에 대한 단서를 남겨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피터에게서 시간의 두께를 본다는 것에 대해 듣고 난 뒤 지배인이 묻는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피터에게 묻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이 시간에 있었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상한 질문입니다. 그가 타임 루퍼라면 그가 어느 시점부터 존재했는지 모를 수 없지요. 반복은 자신이 시작하니까요. 모든 시간에 무엇이 존재했는지 정도는 훤히 꿰고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상황은 딱 하나입니다. 남의 루프에 문득 편입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이고 할 수 있는 질문이죠. 그 역시 피터와 같은 자였던 겁니다. 바로 이것이 반전을 위해 놓아둔 포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작가가 독자에게 처음부터 단서를 제시하면서 공정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 걸 두고 뭐라고 하나요? ‘탄탄한 구성’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피터가 너무 쉽게 로맨스에 빠져든다는 점(지니와의 로맨스 역시도 실은 독자가 반전을 추정하게 만드는 단서라고 생각되기에 여기에 대해선 별 불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타임 루프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단서 말이죠.) 그리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피터가 너무 약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제겐 꽤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타임 루프 물의 중핵이라 할만한 루프의 설정도 단단하고 낯익은 재료들이나 새로운 방식으로 버무려 거기에서 배어 나오는 흥미로움이 있으며 이야기를 감상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은밀하게 깔아둔 단서들을 직접 찾아보게 만들기까지 해서 이야기가 주는 재미에 한껏 빠져버렸네요.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은 타임 루프와 스릴러가 결합한 형태인데, 그 각각을 이루는 정조가 묘하게 대비되네요. 타임 루프에서는 사랑이, 스릴러에선 이기적인 욕망이 주를 이루니까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형식, 그러니까 타임 루프에서 스릴러로 나아가는 전개가 어쩌면 사랑이 이기적인 욕망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사랑이 이기적인 욕망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죠. 타인을 더이상 존중하지 않고 내 마음만 중요하고 그것을 강요하려 든다면 아무리 고귀한 사랑도 순식간에 추잡한 욕망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렇게 토끼처럼 앞서 달리던 사랑이 거북이처럼 뒤따라 오던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잡히는 경우는 비일비재 합니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는 사랑과 욕망 사이에도 일어나는 게임이죠. 작가가 거북이는 결코 아킬레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한 제논의 역설을 소설에 가져온 것엔 어떤 비원(悲願) 같은 게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아킬레우스처럼 이기적인 욕망이 사랑을 절대 따라잡지 못하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을 담아 이런 타임 루프 물을 만든 건 아닐까요? 너무 나간 해석일까요?

그래서 저는 마지막에 이기적인 욕망의 진정한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 피터에게 ‘안녕, 아킬레우스’라고 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왜냐하면 피터가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은 사람을, 그것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니까요. 그 자신도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피터는 순수한 사랑의 상징 같은 존재였습니다. ‘안녕, 아킬레우스’라고 인사한 인물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작가는 태그에 ‘로맨스일까?’라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보면 얼마든지 로맨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사랑과 욕망의 경주가 곳곳에 누벼있으니까요.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결말을 맺기가 어렵네요. 아무튼 제겐 이야기의 여운이 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랑을 사랑으로 온전히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네요. 마지막에 지니에게 찾아온 밤이 그랬듯이 저 역시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가을밤이 코앞에 닥쳐왔기 때문이죠. 부디 차갑지 않고 따스하기를 바라봅니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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